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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군 발암물질도 ‘과다 섭취’ 때 문제 햄·소시지보다 술·담배가 더 위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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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1호 11면

지난달 26일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가공육을 발암물질 1군(群)으로, 붉은 고기를 발암물질 2A군으로 분류한다고 발표해 세계적인 논란이 일고 있다. 1군 발암물질은 사람에게 암을 일으킨다는 증거가 충분하다는 의미이고, 2A군은 암을 일으킬 개연성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광진구의 한 대형마트. 김밥 재료를 고르던 주부 유연주(32)씨는 “김밥에 넣을 햄을 살까 했는데, 아무래도 어묵으로 바꿔야겠다”고 말했다. 마트 내 또 다른 주부도 “햄·소시지 속의 발색제가 찜찜했는데, 암까지 유발한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덜 사먹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수제 소시지와 돈가스를 판매하는 최인재(39)씨는 “하루에 보통 12㎏ 정도의 소시지는 다 나갔는데 지금은 절반도 팔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IARC 발표가 햄·소시지·베이컨·육포 같은 가공육과 쇠고기·돼지고기·양고기 등 붉은 고기 소비량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형마트에서는 햄·소시지 등의 매출액이 IARC 발표 전과 비교해 20~40% 줄어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내외 관련 업계는 반발하고 있다. 한국육가공협회는 “5대 필수영양소의 하나인 단백질의 보고(寶庫)인 가공육과 붉은 고기의 순기능을 무시하고 석면·비소와 동급으로 거론한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했다.


외국의 반발도 거세다. 소시지 다량 소비국인 독일·이탈리아·호주 정부가 특히 그렇다. 독일 크리스티안 슈미트 식품농업부 장관은 성명을 통해 “소시지를 먹을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양이다. 무엇이든 과잉 섭취는 건강에 좋지 않다”고 강조했다. 반발이 거세자 WHO는 지난달 29일 “IARC가 가공육을 먹지 말라고 한 게 아니라 섭취량을 줄이면 대장암 위험을 줄일 수 있다고 밝힌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식품공학자인 최낙언 박사는 “햇빛의 자외선도 발암물질이고, 채소만 먹어도 암에 걸릴 수 있다”며 “발암물질이 있다고 다 암에 걸리는 것도 아니어서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혼란스러워한다. “발표 내용을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육류를 먹지 않을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는 반응이다. 그렇다면 가공육이나 붉은 고기는 얼마나 위험한 것일까. IARC의 발표 내용과 전문가들의 조언 등을 정리했다.


WHO “먹지 말라고 한 건 아냐” 한발 후퇴 이번 IARC 발표는 세계 10개국 22명의 과학자 그룹이 800여 편에 이르는 연구 결과를 분석한 뒤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가공육을 발암물질 1군으로 분류한 것에 대해 집중적인 논란이 벌어진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최경호 교수는 “발암물질 1군으로 분류한 것은 사람에게 암을 일으킨다는 증거가 충분히 확보됐다는 의미”라며 “같은 1군에 속하는 발암물질이라도 발암력(cancer potency)에서 차이가 크다”고 말했다.


물질별 발암력 차이는 암 사망자 숫자로 비교해 볼 수 있다. 흡연은 폐암이나 다른 암의 발생률을 20배 이상 증가시키고, 이로 인해 세계적으로 매년 약 100만 명이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술로 인한 사망자도 연간 60만 명이나 된다.

반면 이번 IARC 발표내용을 보면 붉은 고기를 매일 100g씩(연간 36.5㎏) 섭취하면 대장암 발생률이 17% 증가하고, 가공육을 하루 50g씩(연간 18.25㎏) 섭취하면 대장암 발생률이 18% 증가한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 질병 부담 조사사업팀(Global Burden of Disease Project)’은 가공육 비중이 높은 식사로 인해 세계에서 매년 3만4000명이 암으로 사망한다고 밝혔다. 또 붉은 고기 다량 섭취로 인한 암 사망은 전 세계에서 매년 5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미국에서 전체 대장암 환자의 0.03%만 가공육이 원인이라는 조사도 있다. 미국에선 60세 남성이 대장암에 걸리는 비율이 1.26%로 가공육 섭취를 줄이더라도 별 변화가 없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영국에서는 흡연이 모든 암의 18%를 차지하지만 가공육과 붉은 고기는 3%로 분석됐다.


가공육과 붉은 고기가 암을 일으키는 과정에 대해선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제조·가공·조리 과정에서 생성된 유해물질이 원인일 것으로 지목된다. 육류 보존을 위해 염분을 첨가한 탓에 고기 속에는 질산염과 아질산염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체내에서는 질산염도 아질산염으로 바뀌고, 아질산염은 다시 위장에서 식품 속의 아민과 반응해 발암물질인 니트로소아민(Nitrosoamine)으로 바뀐다. 니트로소아민은 동물의 여러 장기에서 악성종양을 형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리 과정에서 유해물질 생성 가공육을 높은 온도로 튀기거나 구울 경우 다핵 방향족 탄화수소(PAH) 등이 생성된다. 이들 물질 중에는 동물에서 암을 일으키는 것도 많다. PAH는 두 개 이상의 벤젠 고리를 가진 물질로서 대표적인 발암물질이 벤조피렌이다. 벤조피렌은 담배 연기나 자동차 배기가스 속에도 포함돼 있다. 적색육의 경우 헤모글로빈을 함유하고 있어 붉게 보인다. 헤모글로빈은 글로빈 단백질과 철분을 함유한 헴(heme)으로 나뉜다. 헴은 체내에서 포화지방산과 결합하면 엔니트로소화합물(NOC)로 바뀐다. 이로 인해 암 발생률이 증가하게 된다.


하지만 육류가 단백질과 비타민, 철·아연 등 미네랄을 얻을 수 있는 건강한 식단의 일부임은 분명하다. 임종한 인하대 의대 교수는 “가공방법이나 조리방법, 어떤 음식을 같이 먹느냐에 따라 발암물질 노출 정도에 큰 차이가 있다”며 “직화구이보다 돼지고기를 삶아 채소와 함께 보쌈으로 먹으면 발암물질 노출이 적다”고 말했다. 채소는 활성산소 생성으로 인한 피해를 막아주는 항산화제 역할을 한다. 채소에는 섬유소가 많아 발암물질 흡수나 노출을 줄여준다는 것이다.

정부가 육류 섭취량 가이드라인 제시를 IARC는 이번 발표를 통해 가공육 등에 대해 안전 기준, 즉 안전한 수준의 섭취량을 제시하지 않았다. 안전 기준이 존재하는지 결론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세계암연구재단은 붉은 고기 섭취량을 매주 500g으로 제한할 것을, 영국은 붉은 고기나 가공육을 하루 70g 이상 섭취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IARC 조사와는 별도로 2011년 미국 공공과학 도서관 온라인 학술지(PLOS one)에 게재된 논문을 보면 가공육과 붉은 고기의 하루 섭취량이 140g에 이를 때까지는 암 발생 위험이 계속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적은 양이라도 고기를 많이 먹으면 먹을수록 암 발생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140g 이상에서는 상대적 위험도가 높아지지 않았다.


질병관리본부의 2013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육류 소비량은 쇠고기가 하루 21g, 돼지고기가 43g 등으로 하루 60g이 조금 넘는 붉은 고기를 섭취하고 있다. 또 한국인의 가공육 섭취량도 연간 4.4㎏(하루 12g)으로 IARC가 예시한 연간 18.25㎏(하루 50g)에 비해 결코 많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인들은 육가공품을 연간 6.1㎏, 독일인들은 연간 30.7㎏ 소비한다.


문제는 한국인의 대장암 발생률이 높다는 점이다. IARC가 전 세계 184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012년 기준으로 한국인의 대장암 발병률이 남녀 합쳐 인구 10만 명당 45명으로 아시아에서 1위였다. 특히 한국 남성은 10만 명당 58.7명으로 슬로바키아 61.6명, 헝가리 58.9명에 이어 세계 3위를 기록했다. 여성도 10만 명당 33.3명으로 아시아에서 1위, 전 세계에서 5위를 차지했다. 그동안 한국인의 높은 대장암 발병률이 육류 다량 섭취와 운동 부족 탓으로 지적돼 왔으나 이번 발표로 다른 원인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까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식품의약품안전처는 가공육과 붉은 고기의 위해성을 자체적으로 평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농림축산식품부 등 관계 부처와 태스크포스를 구성하고 전문가 자문단을 통해 최종적으로 섭취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방침이다. 서울대 농생명공학부 최윤재 교수는 지난달 29일 한국식품커뮤니케이션포럼 간담회에서 “국내 노인의 90% 이상은 현재 육류 섭취가 부족한 실정”이라며 “정부가 연령대별·성별에 따른 적정 육류 섭취량 등을 담은 가이드라인을 하루속히 마련해 국민에게 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찬수 환경전문기자·정현웅 인턴기자?kang.chans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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