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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view &] 승자의 저주에 빠진 조선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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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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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훈
수출입은행장

세계 1위로 한국 경제·산업의 자랑거리였던 조선업이 최근 위기에 빠졌다. 중소·중견 조선사가 구조조정의 위기에 처해 있고, 세계 조선업 선두권 대기업도 줄줄이 대규모 적자를 내고 있다.

 조선업의 부진은 일차적으로 전 세계적인 조선산업의 경기침체에 기인한다. 세계경제와 교역의 성장세 둔화로 수요가 위축된 상황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경기과열로 투기적으로 발주됐던 선박의 취항으로 조선산업이 공급과잉의 침체 국면으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조선산업 부실의 원인을 경기사이클에만 돌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선도하고 있는 국내 조선사가 부실화된 이면에는 경기둔화에 따른 경쟁심화 상황에서 ‘승자의 저주(winner‘s curse)’에 빠진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승자의 저주는 미국의 행동경제학자인 리처드 탈러(Richard Thaler)가 만든 개념이다. 사업의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공개경쟁입찰 시장에서 최종낙찰자가 사업에 필요한 비용보다 더 낮은 가격으로 계약하게 돼 수주경쟁에서 승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손실을 보게 된다는 게 요지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조선산업의 경기둔화와 경쟁심화 속에 국내 업체는 세계시장에서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기업의 사활을 걸고 선박수주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저가수주를 불사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세계 금융위기 이후 유가 급등에 따른 해외 자원개발 붐으로 발주가 급증했던 해양플랜트 사업의 경우 국내 조선 3사(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가 세계 최고의 경쟁력으로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국내 기업간 비합리적인 과당경쟁과 저가수주로 승자의 저주에 빠졌다는 점이다.

 그럼 이러한 문제의 해결 방법은 무엇인가. 승자의 저주에 빠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사업 가치와 리스크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업은 발주사업에 대한 면밀한 검토와 신중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업수주와 위험관리 시스템을 구축해야만 한다.

 다음은 공급자간 합리적 경쟁 체계 구축으로 불공정한 계약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프로젝트를 수주하고자 하는 기업간 경쟁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쟁을 이용해 발주자가 불공정한 계약을 할 수 없도록 기업은 프로젝트의 표준화, 표준계약 제정 등의 공정한 계약 시스템 구축에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고 자구노력을 모두 기업에만 맡길 수는 없다. 기업의 노력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외부의 적절한 ‘넛지(nudge·주의환기)’가 필요하다. 기업은 자신의 승리를 위해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경주를 하다 보면 자신의 페이스를 잃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을 미리 방지하고 페이스를 조절해 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주의를 환기시켜 주고 결정의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외부의 조력자’가 필요하다.

 사업수주 과정에 있어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금융이다. 금융회사는 자금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기업투자의 적절성을 심사, 판단하는 기능을 부여받고 있다. 따라서 금융회사는 기업이 프로젝트를 수주할 때 철저하게 사업을 평가하고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도록 외부 감시자·조력자의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역할을 하기 위해서 금융회사의 심사능력이 더욱 전문화돼야 한다.

 한국경제에 신뢰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이고 공정한 경쟁 문화와 제도의 정착도 필요하다. 조선산업 위기에는 승리를 위해서는 어떤 변칙적 방식도 불사하는 후진적 경쟁문화가 기저에서 작용하고 있다. 기업의 자구노력과 이를 유도하는 금융시스템, 성숙된 경쟁문화가 정착돼 이번 일련의 위기를 조선산업뿐만 아니라 한국 산업 전체의 국제 경쟁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덕훈 수출입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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