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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출동’ 사이렌 하루 91회 … 식사마저도 사치였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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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0호 11면

강서소방서와 한국공항공사 소방관들이 지난 7일 서울 김포공항에서 열린 항공기 사고 수습 합동훈련에서 화재를 진압한 뒤 승객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기내로 진입하고 있다. 하준호 인턴기자

“구급출동! 구급출동!”


지난 7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의 강서소방서. 구급출동을 알리는 종합상황실의 경보가 울렸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던 구급대원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수저를 내려놓고 일어나 달렸다. 뜨다 만 밥과 반찬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켰다.


소방관들에게 출동은 일상이다. 어디서 뭘 하든 출동명령이 떨어지면 달려 나간다. 소방관의 긴급출동은 구급·구조·화재 등 세 가지로 나뉜다. 구급출동은 응급환자를 목적으로 구급대만 나선다. 사고로 위험에 처한 경우에는 구조대가 동행한다. 화재 출동은 화재를 신속하게 진압하고 인명을 구조하기 위해 지휘·진압·구조·구급대가 총동원된다.


휴가도 눈치 … 부부 대원은 출산 미뤄지휘·진압·구조·구급의 각 대원은 세 팀으로 나뉘어 3교대로 근무한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소방행정과의 한 소방관은 “3교대 전환 후 총인원은 늘었지만 예산이 부족해 실제 3교대에 필요한 인원의 60~70%만 충원됐다”고 말했다. 현재 이 소방서의 현장대응 인원은 주야간 각각 30명(휴가 인원 제외한 실근무 인원) 정도다. 지휘팀의 한 대원은 “팀이 3개라 3교대지 사실상 주야간으로 나뉘는 2교대 체제”라며 “한 대원에게 주어지는 업무가 과중해 휴가도 마음대로 쓸 수 없다”고 말했다. 부부가 모두 소방관이라는 한 구급대원은 “부부가 얘기를 나눌 시간조차 없어 자녀계획을 자꾸 미루고 있다”고 했다.


소방관은 출동이 없어도 바쁘다. 위기상황을 가정한 훈련의 연속이다. 주야간 임무교대 때 한 차례씩 장비 점검과 위험예지훈련을 한다. 특히 이날 오후 3시 관내의 김포공항에서는 대테러 및 항공기 사고 수습 합동훈련이 진행됐다.


‘꽝’ 하는 굉음과 함께 연막이 피어올랐다. 소방차가 신속하게 달려와 물줄기를 뿜었다. 이어 구조대원들이 항공기에 진입해 안에 있던 승객들을 안전하게 대피시켰다. 가상의 상황이었지만 소방대원들의 눈빛은 실전을 방불케 했다. 훈련 중에도 대원들은 항상 긴급출동에 대비해야 한다. 실제로 이날 오전 예행훈련을 하던 대원들이 긴급출동 알림을 받고 훈련장을 쏜살같이 빠져나가기도 했다.


오후 5시30분 진압대 대기실. 임무교대를 기다리는 대원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대기실 한쪽엔 개인사물함이 빽빽하게 놓여 있었다. 빨래가 여기저기 널렸다. 책상은 달랑 하나였다. 한 진압대원은 “이 정도면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진 편”이라고 말했다. 다른 대원은 “누가 봐도 열악하지만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우리들 중 환경을 탓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웃었다.


“구조출동! 구조출동!”


평화로운 오후가 이어지는가 싶더니 금세 또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오후 7시58분. 1층 대기실에 있던 구조대원과 구급대원들이 출동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차량에 탑승하니 신고내용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왔다. 방문을 잠그고 수면제를 과다 복용한 가족을 구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한 대원이 구조차량에 탑승한 채 신고자와 계속 통화했다. 그는 시시각각 변하는 현장의 상황을 파악해 다른 대원들에게 알리면서도 때로는 신고자를 안심시켰다. 다른 구조대원은 장갑을 끼고 문을 강제로 개방할 장비를 챙기느라 분주했다.


소방관들은 출동 후 5분 내 현장에 도착해야 한다. 하지만 교통 사정이 여의치 않아 제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날도 도로에 차량이 많아 신속히 이동하는 데 애를 먹었다. 한 구조대원은 “시민들이 긴급출동하는 소방차를 보고도 길을 터주지 않는다”며 “내 가족이 위급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조금씩만 양보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천신만고 끝에 현장에 도착했지만 구조대는 허탈하게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출동하는 동안 신고자가 잠긴 문을 열고 수면제를 토하도록 한 것이다. 더 이상 구조대원이 할 일은 없었다. 다만 구조자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구급대만 올라갔고, 특별한 이상이 없어 상황이 완전히 종료됐다. 그제야 손에서 장비를 내려놓은 구조대원은 “내부 잠금장치 개방이나 위치추적 요청 같은 경우 출동 중 상황이 종료되는 일이 종종 있다”며 “부모들이 자녀와 통화가 안 된다고 위치추적 신고를 했다가 취소하기도 한다”고 했다.


힘들게 도착했더니 상황 끝 … 그나마 다행“화재출동! 화재출동!”


또 한 번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한밤의 정적을 깼다. 이번엔 화재신고다. 전 대원이 비상이다. 화재는 자칫 큰 인명사고로 이어질 수 있어서다. 현장에 동행하는 내 등에도 식은땀이 흘렀다. 대원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모두 아라미드 소재(강도와 내열성이 뛰어난 특수섬유로 소방이나 항공우주 분야에 사용)의 방화복으로 바꿔 입었다.


현장에 도착해 보니 음식물 조리 중 냄비가 타는 바람에 오인한 단순 해프닝이었다. 화재 조사를 위해 몇몇 대원만 현장에 진입했다. 나머지 대원도 무거운 장비를 그대로 걸친 채 대기했다. 10여 분간의 조사가 끝나고 화재 위험이 없다는 점을 확인하고야 대원들은 소방서로 발길을 돌렸다. 지휘팀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사건·사고는 기자들을 무서워하나 봐”라고 내게 농담을 건넸다.


큰 화재나 사고는 없었지만 초짜 소방대원인 내게는 전쟁 같은 하루였다. 이날만 긴급출동 사이렌이 91차례나 울렸으니 말이다. 평소보다 20~30건 많은 수치다. 그러나 지휘팀장은 되레 “고생이 많았다. 그런데 취재할 거리가 없었던 것 아니냐”며 걱정해줬다.


체험을 마치며 민원업무를 맡은 한 소방관의 이야기가 귀에 맴돌았다. 경력 30년차인 그는 “대형사고가 터져야만 소방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다”며 “정작 지금도 현장에선 출동한 소방대원들이 폭행당하는 사건이 종종 일어난다”고 말했다. 보름 새 이 소방서 구급대원이 출동 현장에서 폭행을 당해 부상을 입은 것만 2건이다. 어쩌면 고된 훈련과 반복되는 출동보다 소방관들을 더욱 괴롭히는 것은 시민들의 무관심과 횡포일지도 모른다.


하준호 인턴기자(연세대 정치외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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