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커버스토리] 지식인일수록 탐지기 겁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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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쉽게 속이더라도 거짓말 탐지기는 못속입니다."

서울시경찰청 과학수사계 조호남(52.사진) 경사는 13년간 거짓말 탐지기를 다룬 베테랑이다. 그는 거짓말 탐지기의 정확성에 대해 80~90%가량 자신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탐지기를 다루던 초기 몇 년은 '판단 불능' 판정을 자주 내렸다. 거짓말 탐지기가 그려낸 그래프를 해석하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짓말 탐지기는 심장박동.호흡 등의 변화를 그래프로 그린다.

"판단 능력이 떨어지는 어린아이나 나이 많은 노인들의 경우 거짓말 검사를 하기 힘듭니다. 윤리.도덕과 아예 담을 쌓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잘 안통하죠."

지식인일수록 거짓말 탐지기에 앉으면 반응이 잘 나타난다.

거짓말 탐지기가 가장 자주 활용되는 분야는 교통 사고. 접촉 사고가 나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지만 거짓말 탐지기에 앉으면 결과가 달라진다. "진짜로 현장을 봤다"던 목격자들의 태반은 가짜 판정을 받는다.

가끔 손 안대고 코 푸는 일도 생긴다.

"용의자들이 거짓말 탐지기에 앉기도 전에 불쑥 자백하는 일이 많습니다. 거짓말을 들키는 게 두려운 거죠."

검사실에는 정확한 측정을 위해 검사를 받을 사람과 조경사 둘만 남는다. 대신 바늘구멍 카메라, 녹음기와 CCTV가 설치돼 있다. "밀실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며 억지를 부리는 경우가 많아 마련한 장치다.

얼마 전에도 조사를 받으러 온 50대 여성이 검사 의자에 앉자마자 "경찰이 사람 치네! 경찰이 사람 쳐요!"라고 소리를 쳤단다. 그럴 때 조용히 CCTV 화면을 손으로 가리키면 상황은 종료된다.

거짓말 탐지기가 거짓말쟁이를 찾아내는 역할만 하는 건 아니다. 지난해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거짓말 탐지기 덕분에 혐의를 벗었다. 동료 경찰은 "다 잡은 범인을 놓치게 생겼다"며 길길이 뛰었지만 한 달 뒤 진범이 잡혔다. 거짓말 검사 결과가 법원에서 결정적인 증거로 채택되는 일은 많지 않다. 하지만 무고한 사람의 혐의를 풀어주는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는 셈이다.

그가 맡은 거짓말 검사는 하루에 3~4건. 10년 전만 해도 한 해에 3~4건 뿐이었다.

"제가 할 일이 없어야 세상이 살기 좋아지는 걸텐데, 어찌 된 일인지 점점 바빠지네요."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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