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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당한 여성은 피해자일 뿐이다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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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국의 일요 신문 선데이타임스에 실린 크리시 하인드(록 밴드 프리텐더스의 싱어)의 인터뷰 기사가 파문을 일으켰다. 인터뷰에서 그녀는 21세 때 성폭행을 당했으며 그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다.

옷차림과 몸가짐이 원인 제공한다는 주장 있지만 다른 범죄처럼 가해자에게 초점 맞춰야…영국의 경우 90%가 면식범 소행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엄밀히 말해 그것은 전적으로 내 잘못이며 내가 책임질 일이다. 문제를 자초해 놓고 남 탓을 해선 안 된다.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난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다.”

자신의 과거사로 시작된 하인드의 이야기는 여성과 성폭행에 관한 좀 더 일반적인 주제로 옮겨갔다. 그녀는 만약 어떤 여성이 ‘도발적인’ 옷차림으로 술에 취해 길거리를 걷다가 성폭행당했다면 자업자득이라고 말했다.

“단정한 옷차림에 몸가짐을 조심하면서 걸어가다가 성폭행을 당했다면 그건 상대방의 잘못이다. 하지만 야한 옷차림에 흐트러진 몸가짐을 보인다면 이미 성충동에 사로잡힌 누군가를 유인하는 셈이다. 그런 행동을 삼가야 한다.”

“성폭행범을 유인하고 싶지 않다면 하이힐을 신지 말아야 한다. 하이힐을 신으면 도망치는 데도 불리하다. 성충동을 일으킬 만한 도발적인 옷차림을 했다면 신발이라도 활동이 편한 것으로 신어야 한다.”

하인드는 다른 모든 성폭행 피해 여성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경험을 자기 방식대로 기억하고 말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사적인 자리에서 말하는 것과 세계 유수의 신문 인터뷰에서 성폭행 피해 여성에 관한 일반론을 펼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하인드의 발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다. 이 인터뷰는 영국에서 큰 논란을 일으켰다. 라디오와 TV에서는 성폭행 사건에서 성폭행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한 피해 여성에게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지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ITV 프로그램 ‘루스 위민(Loose Women)’은 웹사이트에서 ‘성폭행이 피해 여성의 책임인가?’를 묻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 중 12.15%가 ‘그렇다’고 답했다.

성폭행 피해자 단체와 피해자 지원단체, 여권주의자들이 피해 여성에게 책임있다는 견해를 반박하고 나섰다. 그러자 시사해설가들은 그들이 하인드의 ‘입을 막으려 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하인드의 견해는 그녀 혼자만의 과감한 발상이 아니다. 성폭행은 피해자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말한 유명인사는 그녀 이전에도 많았다.

사실 많은 사람이 이 견해에 동의한다. 영국 정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영국인의 3분의 1 이상은 성폭행 피해자가 사전에 추파를 던졌을 경우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또 4분의 1 이상은 피해자가 술에 취했을 경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하인드의 성폭행 관련 발언을 기사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성폭행 피해자 단체와 지원단체들은 하인드의 발언에 대한 강력하고 공적인 반론을 제시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관한 발언은 다양한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매년 8만5000명의 여성이 성폭행을 당하며 성폭력 피해자는 40만 명에 이른다. 하지만 심각한 성폭력 피해자 중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는 15%에 불과하다. 성폭행에 관한 논의가 매우 중요한 이유다.

성폭행 피해자가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는지 없는지를 공적으로 논할 때(다른 범죄에 관해서는 상상도 못할 논의다) 염두에 둬야 할 점이 있다. 이런 논의는 피해자에게 자신이 그 사실을 세상에 알릴 경우 비난을 받거나 불신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또한 성폭행범에게는 변명할 구실을 만들어줄 가능성이 있으며 배심원단과 경찰관들에게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심어 줄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런 논의는 정말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성폭행 피해자의 책임에 관한 논의 중 너무도 많은 부분이 사실상 완전히 틀렸다는 점은 매우 걱정스럽다. 수많은 기사와 토론 방송 프로그램이 성폭행 방지를 위해 여성이 옷을 분별 있게 입거나 행동을 조심해야 한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그것이 ‘상식’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많은 사람이 이상적인 세상에서는 여성이 마음 내키는 대로 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분별 있게 옷을 입고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문제는 이런 주장 중에 여성이 옷차림이나 행동을 바꿈으로써 성폭행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이론을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하는 경우는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이론이 틀렸기 때문이다.

영국 국무부와 법무부, 통계청의 최근 통계에 따르면 성폭행 피해자의 90%가 배우자나 동료, 친구 등 아는 사람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우리는 또 세계 곳곳에서 운동복부터 부르카(무슬림 여성이 얼굴을 비롯해 온몸을 휘감는 데 쓰는 천)까지 온갖 종류의 옷을 입은 여성이 성폭행당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피해자의 연령 또한 아기부터 90대까지 다양하다. 이런 사실은 성폭행범이 미니스커트나 가슴이 깊게 파인 옷을 입은 젊고 매력적인 여성을 보면 성욕을 참지 못하고 공격한다는 이론이 틀렸음을 입증한다.

성폭력은 힘과 통제력의 문제

성폭행은 매력이나 섹스와는 아무런 상관없다. 그것은 힘과 통제력의 문제다. 또한 여성에게 성폭행 방지를 위해 술을 마시거나 혼자 다니지 말라고 조언하는 것은 통계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보다는 자신의 침대에서 잠옷을 입은 채 성폭행당할 위험이 더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성의 옷차림이나 행동에 관한 이런 조언들은 남성 피해자의 경험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성폭행이 단순히 남성이 원초적 욕구를 억제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며 그것을 피하는 것은 전적으로 여성의 책임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다수 남성에게 대단히 모욕적인 일이다. 그보다는 다른 범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해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젊은이에게 동의하에 이뤄지는 건강한 관계와 성폭력에 관한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성폭행에 관한 진실이 좀 더 널리 이해될 때까지 우리는 피해자를 수치스럽게 만들고 책망하며 가해자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성폭행 관련 ‘논의’에 대응해야 한다. 그런 논의는 사실상 전혀 근거가 없다.

우리가 지금 이 시점까지도 성폭행 피해 여성에게 책임이 있는지 없는지를 논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인 일이다.

글 = 로라 베이츠  번역 = 정경희

[ 필자 로라 베이츠는 직장과 일상생활에서 성희롱과 차별을 당하는 여성 8만여 명의 사연을 수집·분석한 ‘에브리데이 섹시즘 프로젝트(Everyday Sexism Project)’의 창설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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