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훈범의 생각지도

배신은 가까운 곳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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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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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논설위원

‘배신의 정치’가 조금씩 실체를 드러내는 모양새다. 우리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부탁했던 심판이 뭘 의미했는지 말이다. 사전선거운동 논란까지 무릅쓸 만큼 울컥한 게 뭐였는지도 그렇다. 사실 좀 싱겁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까닭이다. 결국 공천권이었다.

권력 앞에서 곧추서는 배신은 없다
힘이 빠졌을 때 곁에서 싹트는 것

 지역구 의원들을 단체로 물 먹였던 대통령의 대구 행차 때 청와대는 확대해석을 경계한다고 했었다. 그러면서도 대구 지역에 연고가 있는 참모들이 동행한 데 대한 설명은 없었다. 이제 이른바 친박이라는 사람들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그런 분들이 오는 것을 뭐라고 하면 안 된다.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라고 정치 못하는 건 아니다.”

 맞는 얘기다. 피선거권만 있다면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출마할 수 있는 게 민주공화국이다. ‘그런 분들’이 후보로 적절한지는 “여론 수렴을 거치면 된다”는 건데, 그 방법이 오픈프라이머리가 아니라 전략 공천이다. 한마디로 공천이 곧 당선인 지역에 ‘배신하지 않을’ 확실한 내 사람을 심겠다는 거다.

 우리 대통령은 수많은 배신의 그림자를 밟고 왔다. 아버지를 배신한 사람들 위에 자기에게 처절한 배신감을 느끼게 한 사람들이 중첩된다. 그래서 더, 크고 작은 배은(背恩)과 망덕(忘德)에 과민반응을 보인다. 세월호 사고 때, 메르스 사태 때 대통령은 또 한 번 그런 감정을 느꼈을 터다. 비난의 화살이 태양을 가리고 지지율이 피처럼 뚝뚝 떨어지는데 믿었던 사람들조차 방패를 들고 나서길 꺼리는 데서 장작과 쓸개보다 더 거칠고 쓴 분노를 맛봤을 것이다. 그래서 더, 남은 임기 동안 자신을 엄호할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느꼈을 만하다.

 하지만 그건 면역체계 이상에 따른 배신 알레르기라는 게 내 진단이다. 한마디로 과민반응이란 말이다. 살아 있는 권력 앞에서 고개를 곧추세우며 하는 배신은 없다. 그건 차라리 들어두면 약이 되는 쓴소리거나 현실로 눈높이를 끌어다 맞추는 직언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 게 없을 때 오히려 더 긴장해야 하는 이유다.

 그걸 알아봤던 사람이 당(唐) 현종이다. 그는 재상 한휴한테서 하도 잘못을 지적당해 몸이 수척해지기까지 했다고 한다.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이 일을 한휴가 알면 어쩌지”라며 두려워했을 정도였다. 한휴를 왜 내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말라도 천하와 백성은 살찌지 않는가. 그게 내가 한휴를 기용한 이유다.” ‘개원의 치(開元之治)’가 달리 가능했던 게 아니다.

 배신은 권력자가 힘이 빠졌을 때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지금 듣기 좋은 말을 하고 있는 측근에게서 배신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배신 알레르기가 더 위험한 게 그래서다. 이롭거나 적어도 무방한 건 재채기로 뱉어내고 달콤하나 해로울 수 있는 건 기분 좋게 삼킬 가능성이 높은 까닭이다.

 현종 같은 성군도 말년에 그랬다. 갈수록 간언(諫言)에 염증을 내고 감언(甘言)에 빠져들었다. 조고·진회와 함께 중국 3대 간신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이임보가 등장하는 배경이다. 이임보는 간신의 전형이다. 음험한 성격에 음모에 능하며 모함에 탁월했다. 그렇게 황제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18년 동안 재상을 했다. 그의 주특기가 달콤한 말이다. 황제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감언으로 홀렸다. 속마음은 달랐다. 그의 서재에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으면 다음 날에는 누군가 죽거나 감옥에 가는 일이 일어나 사람들이 두려워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입에는 꿀이 있지만 뱃속에는 칼이 있다는 ‘구밀복검(口蜜腹劍)’이 그에게서 비롯됐다.

 꿀 발린 칼이 주군을 향하는 게 배신이다. 내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을 입 속의 혀 같은 사람들로 바꾼다고 배신의 위험이 줄어들지 않는단 말이다. 허물에 당의(糖衣)를 입힐 뿐이니 외려 위험이 커질 수 있다. 대통령과 가까운 거리의 사람들을 싸잡아 잠재적 배신자로 모는 것 같아 안됐지만, 경계가 불가피하니 어쩔 수 없다. 이해하시라.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