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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으로 낮춘 달러 … 30년째 일본 괴롭히는 ‘환율 업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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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5호 18면

1985년 9월 22일 플라자 합의에 서명한 뒤 활짝 웃는 G5 재무장관들. [중앙포토]

# 장면 1. 1985년 9월 22일 미국 뉴욕의 플라자호텔. 미국·영국·프랑스·독일·일본 5개국 재무장관들이 모였다. 세계 무역을 주름잡는 나라의 경제수장들 회동은 은밀했다.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일본 대장상은 취재진을 따돌리기 위해 골프복 차림으로 공항으로 나가 태평양을 건너왔다. 회의가 시작되자 미국 재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목청을 높였다. “엔화가 너무 저평가돼 미국 무역적자가 극심하다. 엔화 강세를 유도해달라”. 달러 가치를 떨어뜨려 미국의 수출 경쟁력을 회복하고 무역적자를 줄이겠다는 속내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베이커의 압박에 장관들은 엔화 절상, 달러 절하에 동의했다. 이들은 미국의 적자가 계속되면 기축통화인 달러의 위상이 흔들리게 될 것을 우려했다. 외환의 수급에 따라 환율이 결정되는 ‘시장 경로’를 거치지 않은 강제적·인위적 결정이었다. 글로벌 환율 역사에 가장 두터운 장(章)으로 기록될 ‘플라자 합의’는 이렇게 이뤄졌다.


# 장면 2. 2015년 9월 16일. 미국의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푸어스(S&P)는 일본의 국가신용등급을 네 번째 단계인 ‘AA-’에서 다섯 번째 단계인 ‘A+’로 한 계단 강등한다고 밝혔다. S&P는 강등 이유로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디플레이션을 타개하려는 일본 정부의 경기부양책이 2~3년 이내에 경제상황을 역전시키지는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베노믹스’를 앞세운 일본 정부가 중앙은행(BOJ)의 윤전기를 돌려 돈을 찍어내 인플레이션 유도와 경기 회복을 시도하고 있지만, 단기간 내에 경기하락 추세를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본 것이다. 30년 전 미국 플라자호텔 회의와 2015년 일본 중앙은행 윤전기의 고속 가동. 전혀 다른 시공간에서 벌어진 별개의 두 사건은 실제로는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플라자 합의라는 30년 전의 날갯짓이 지금도 글로벌 경제 구석구석에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장면 1’은 어떻게 긴 세월을 거쳐 ‘장면 2’에까지 연결되는가. 글로벌 화폐경제사를 되짚어 올라가면 그 궁금증이 풀린다. ‘환율의 위력’과 환율마저 주무르는 국제경제 ‘힘의 논리’가 궁금증 해소의 두 키워드다. 미국 쌍둥이 적자 해소에 일본 희생다시 1985년의 플라자호텔. 협약 당시 미국은 절박했다. 1981년 45억 달러 흑자였던 경상수지는 그해 1190억 달러 적자로 돌아섰다. 이 가운데 429억 달러가 대(對)일본 적자였다. 재정수지·무역수지가 모두 마이너스인 ‘쌍둥이 적자’를 탈피하려면 경기회복이 절실했고 가장 쉬운 방법이 달러의 평가절하였다.


협약의 위력은 대단했다. 달러에 대한 엔화 환율은 235엔에서 하룻밤 새 20엔이 내렸다(엔화절상). 1년 뒤엔 120엔이 됐다. 달러 값이 내리면서 일본이 무역흑자로 번 돈으로 사들인 미국 국채의 실질 가치도 반 토막이 났다. 미국은 일본에 대한 부채를 앉아서 절반으로 줄였고, 일본은 대미 무역에서 번 부(富)의 절반을 1년여 만에 날렸다.


미국이 글로벌 화폐시장에 힘을 행사한 것은 당시가 처음이 아니었다. 미국의 전력(前歷)은 화려했다. 플라자합의 14년 전인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저녁.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TV드라마 ‘보난자’를 중단시키고 긴급성명을 발표했다. “달러의 금 태환을 정지하고, 국내 물가를 통제하고, 수입품에 엄청난 과징금을 부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종이에 숫자를 인쇄한 물질에 불과한 달러라는 지폐의 가치를 금으로 보장하는 것을 포기하겠다는 일방적 선언이었다. 당시에도 재정적자에 허덕이던 닉슨 정부는 금환본위제 포기와 달러가치 평가절하라는 손쉬운 해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로써 30년 가까이 세계경제의 흐름을 지배해 온 브레튼우즈 체제는 깨졌다.


이후 미국은 달러 가치를 금이나 다른 재화에 연계하지 않는 ‘명목화폐제도’를 선택하면서 불황의 조짐이 보이면 언제든 달러 공급량과 환율 손보기라는 방법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플라자합의도 ‘닉슨쇼크’라는 날갯짓이 만든 필연이었던 셈이다. 영국 경제학자 J. V. 로빈슨은 이러한 미국의 정책에 대해 “다른 나라의 경제를 희생시키면서 자국의 이익만 추구하는 근린 궁핍화(Beggar-thy-neighbor) 정책”이라고 말했다. 효과 한계 부딪힌 아베노믹스플라자합의 이후 엔화가 절상되면서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1985년 6.3%에서 이듬해 2.8%로 하락했다. 일본 정부는 급격한 엔고로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고 불황 조짐이 보이자 저금리 정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행(BOJ)은 1986년부터 이듬해 초까지 1년여 만에 정책 금리를 5차례에 걸쳐 5%에서 2.5%로 떨어뜨렸다. 금리가 떨어지자 유동성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증시로 몰린 돈은 니케이 지수를 3년 새 3배나 끌어올렸다. 1987년 일본의 주식시장 시가총액이 미국을 앞섰다. 부동산 시장은 더 심하게 요동쳤다. 땅값은 한해 70%씩이나 뛰어올랐다. 1990년이 되자 일본 전체 부동산 가치는 2000조 엔을 넘어섰다. 미국 전체 땅을 4번 살만한 액수였다. 일본 경제 구석구석에 낀 거품은 부풀어오를 대로 부풀어올랐다. 잃어버린 20년이 이렇게 막을 올리고 있었다.


일본은행은 부동산 폭등을 잡기 위해 금리를 급격히 올렸다. 1989년 5월 한번에 0.75%포인트를 올린 것을 비롯해 1990년 8월까지 1년여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3.5%포인트나 금리를 올렸다. 돈줄이 마르면서 결국 거품이 터졌다. 경기는 움츠러들고 부동산값과 주식시장이 곤두박질쳤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말까지 10년 사이 주가지수는 3만8000대에서 6000대로 6분의 1토막이 났다. 1989년에 구입한 1억 엔짜리 주택의 가격은 2009년 2800만 엔까지 떨어졌다.


일본 경제는 1991년 이후 22년간 저성장 상태에 빠졌다. 잃어버린 10년이 20년이 됐고, 이제 30년으로 늘어날 위기에 처했다.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내려도 경제 회복 효과는 없었다. 정부부채가 GDP대비 240%에 육박하는 세계 최고 부채비율로는 재정지출 확대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 상황에서 아베 신조( 安倍晋三) 총리는 승부수로 양적완화 카드를 꺼냈다. ‘돈 풀어 엔화가치 낮추기’에 기대기로 한 것이다.


2013년 4월부터 2년간 일본은행은 1조4000억 달러(1500조원)에 해당하는 엔화를 찍어내 국채보유를 두 배로 늘렸다. 미국은 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말부터 4년여 동안 양적완화를 통해 본원통화를 배로 늘렸다. 그런데 일본은 그 절반의 기간인 2년만에 본원통화를 배로 늘린 것이다. 일본이 훨씬 대담한 양적완화 조치를 취한 것이다. 일본은 현재 연간 80조엔(800조원)의 양적완화를 지속하고 있다.


아베노믹스 효과로 일본 경제는 잠시 회복세를 보였으나 다시 주춤하고 있다. 지난달 무역적자는 5697억엔(약 5조5285억원)으로 7개월래 최고치를 기록했다. 올 2분기 경제성장률은 -0.3%(전분기대비)로 3분기 만에 다시 감소세로 돌아섰다. 음식과 에너지를 제외한 8월 소비자물가도 전년 동기 대비 0.6% 오르는 데 그쳤다. S&P가 일본의 신용등급을 낮춘 배경이다.


일본의 양적완화는 전세계적인 통화전쟁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재정위기로 혼난 유럽도 양적완화를 시행해 유로화 가치 낮추기에 나섰다. 중국은 경제 경착륙을 막기 위해 인위적으로 위안화 가치를 낮추고 있다. 반면에 한국은 불황형이지만 경상수지 흑자행진이 41개월째 계속돼 환율시장에 개입할 명분이 약하다. 한국 기업의 수출경쟁력은 계속 떨어지고,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 예고 장면 일본 내에서는 아베노믹스 약발이 다했다는 지적과 함께 추가 양적완화에 대한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7일자에 “BOJ는 연간 80조 엔(6670억달러) 규모의 국공채를 사들이고 있으나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다?고 보도했다. 일본 중앙은행의 윤전기는 조만간 가동속도를 높일지 모른다. 30년 전 힘의 논리가 만들어낸 나비효과는 앞으로도 계속된다는 얘기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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