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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나를 흔든 시 한 줄

김근식 경남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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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김수영(1921~68), ‘풀’ 중에서

김수영의 ‘풀’을 처음 접한 1980년대는 군사독재하 불퇴전의 투쟁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거친 언어와 꺾이지 않는 원칙이 항상 우세했던, 그래야만 괴물 같은 군사독재와 싸울 수 있던 시기였다. 당시 이 시는 꺾이지만 결국 일어서는 저항의 ‘강인함’으로 나를 매료시켰다. 정치색이나 사회성 짙은 단어 하나 없이 가장 서정적인 내용으로도 독재에 항거하는 민초의 꿋꿋함을 노래한 훌륭한 시로 간주됐다. 독재타도의 학생운동을 정당화하는 강력한 정치적 서정시였다.

 30년이 훌쩍 지나 중년이 된 지금, ‘풀’은 또 다른 맛으로 다가온다. 먼저 누울 줄 아는 유연함, 바람에 더 빨리 울 줄도 아는 현실주의, 먼저 눕고 먼저 우는 부드러움이 오히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내공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언제나 변하지 않는 남산의 소나무도, 결코 부러지지 않는 대나무도 훌륭하지만, 오히려 바람에 먼저 울고 바람보다 빨리 눕는 현실적 유연함이야말로 훗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웃을 수 있는 힘의 뿌리임을 깨닫게 된다. 이제 우리에겐 강경한 원칙보다 부드러운 유연함이 훨씬 더 매력적이고 필요하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