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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헝그리 정신은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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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걸그룹 여자친구의 ‘오늘부터 우리는’이라는 노래가 요즘 온라인에서 화제다. 아니, 정확히는 어떤 팬이 열흘 전인 5일 한 라디오 공개방송 때 찍은 ‘직캠’ 동영상이 화제를 모으며 차트를 역주행 중이다. 이 영상은 유튜브에서만 이미 600만 뷰를 넘어섰고, 그 덕분인지 올 초 데뷔해 이번 시즌 활동을 마치자마자 거꾸로 멜론 등 주요 차트에서 10위권 위로 치고 올라가고 있다.

 그런데 이유가 좀 꺼림칙하다. ‘빗물 때문에 여덟 번 넘어지는 영상’이라는 이름으로 SNS상에서 급속히 퍼진 데서 알 수 있듯, 이 신생 걸그룹은 많이 넘어지는 걸로 주목받았기 때문이다. 4분이 채 안 되는 짧은 공연 동안 6명의 멤버가 번갈아 가며 무려 여덟 번이나 바닥 위에 철퍼덕 하고 쓰러진다.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많은 한국 팬은 예쁜 외모 뒤에 가려져 있던 걸그룹의 오뚝이 같은 헝그리 정신을 높이 산다. 심지어 타임 등 외국 언론도 “노래 한 곡에 여덟 번 넘어진 K팝 스타의 영상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다”고 칭찬했다. 영상을 보면 노래 시작 25초 만에 한 멤버가 머리를 바닥에 찧을 정도로 세게 넘어지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일어나 격렬한 안무를 소화한다. 빗길이나 빙판길에서 살짝 삐끗만 해도 걷기조차 무서워지는 경험을 떠올린다면 이들의 프로정신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이들의 무대 위 투혼과는 별개로 안타깝고 답답한 것도 사실이다. 다행히 큰 사고 없이 끝났지만 자칫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주최 측이 안전을 조금이라도 고려했다면 당연히 공연을 중단시켰어야 했다.

 이 영상이 세계적인 화제를 모은 탓에 유튜브 동영상에는 비난조의 영어 댓글이 많이 달려 있다. 한 네티즌은 “한국에선 늘 벌어지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한국 아이돌 그룹은 (이런 상황에서도) 공연을 거부할 권리가 없느냐”며 “이건 ‘대단한 정신력’이라는 식으로 칭찬받을 일이 아니라 바보 같은 일”이라고 분개했다.

 굳이 세월호 참사나 돌고래호 사고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늘 그래왔는데 괜찮겠지’라는 안일함이 말도 안 되는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걸 우리는 이미 여러 번 목격해왔다. 칭찬을 가장해 나이 어린 걸그룹에게 시대에도 맞지 않는 헝그리 정신을 강요하는 건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진정한 팬이라면 칭찬 대신 걱정을 쏟아내야 한다”는 한 외국인의 댓글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안혜리 중앙SUNDAY 기획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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