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 난민 무제한 수용 ‘통 큰 결단’은 끝 아닌 시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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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호 10면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왼쪽)가 지난 10일(현지시간) 베를린 이주민·난민등록센터를 방문해 난민과 함께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고 있다. [AP=뉴시스]

“내전으로 신음하는 시리아 출신 난민들이 독일에 머물기를 원한다면 모두 수용하겠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통 큰 결단’이 난민 문제로 고민하는 유럽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메르켈의 난민 이니셔티브’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조치로 서유럽행을 기다리는 난민들은 열광하고 있다. 지중해의 거친 바다를 떠돌거나 터키·레바논·헝가리 등의 난민캠프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던 난민들에겐 서광이 비치는 희망의 메시지다.


 독일은 메르켈 총리의 약속대로 지난 5일부터 이웃 오스트리아와 공조해 헝가리에서 들어오는 난민을 조건 없이 수용하고 있다. 거의 매일 1만 명가량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뮌헨 하우프트반호프(중앙역)에 도착하고 있다. 12~13일엔 4만 명이 한꺼번에 유입될 것으로 예상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던 유럽의 난민 위기가 메르켈의 처방을 통해 극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올해 독일 난민 신청 80만 건 예상일시적이긴 하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시리아 난민 무조건 수용 조치는 기존의 더블린 난민 규약을 깨는 것이다. 더블린 규약은 ‘유럽연합(EU) 지역에 들어온 모든 난민은 최초로 발을 들여놓은 국가에 망명을 신청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약에 따르자면 EU 회원국인 헝가리에 입국한 난민은 헝가리에서 난민 신청을 해야 한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이에 얽매이지 않고 EU 회원국인 헝가리로 입국한 난민이라도 돌려보내지 않고 모두 수용하겠다고 한 것이다.


 메르켈 총리는 “전 세계가 우리를 지켜보는 이때 ‘시리아는 너무 먼 곳이고 우리는 관심 없다’고만 말할 수 없는 노릇”이라며 “그렇게 하면 유럽 이미지는 엄청난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정부의 전향적 정책에 따라 올해 독일에서는 지난해보다 4배나 많은 80만 명이 난민 신청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독일은 이들을 위해 내년에 60억 유로(약 8조원)의 예산을 배정하기로 했다.


 메르켈의 ‘무티(엄마) 리더십’에 유럽 각국도 난민을 추가 수용하겠다고 속속 호응하고 있다. 장클로드 융커 EU집행위원장은 지난 9일 유럽의회 연설에서 “난민 위기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이제 EU가 과감하고 단호하게 이 문제에 대응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융커 위원장은 이를 위해 EU 회원국들에 난민 16만 명을 분산 수용하자고 제의했다. 당초 EU 계획인 4만 명의 4배다.


 프랑스와 영국은 사상 초유의 난민 위기 대응에 보조를 맞추기로 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가 향후 2년에 걸쳐 2만4000명의 난민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밝혔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도 앞으로 5년간 시리아 난민 2만 명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다.


독일행 원하는 시리아·이라크인 늘 듯독일의 주도로 유럽이 난민에 대한 문호를 대폭 개방함에 따라 시리아·이라크 등을 탈출하려는 난민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이라크 바그다드의 타흐리르광장에서 매주 금요일 열리고 있는 반부패·반정부 시위에선 “형편이 된다면 독일로 가자”는 구호가 나오곤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같은 구호가 돌아다닌다.


 이처럼 메르켈 총리의 난민 이니셔티브는 독일의 위상을 한껏 올려놓았다.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원죄를 안고 있는 독일은 그동안 사죄와 반성, 보상으로 꾸준히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어냈다. 이어 이번엔 시리아 난민 무조건 수용으로 독일은 중동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친밀한 국가 이미지를 구축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난민에 대한 동정심과 아량은 전범국이라는 죄책감에 사로잡힌 국가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튼튼하고 유럽 내 위치에 자신감을 갖는 변화된 독일을 반영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난민 문제는 지금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멀고도 험하다. EU집행위의 난민 분산 수용안에 회원국들은 제각각 다른 입장이다. 체코·헝가리·폴란드·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4개국 정상은 “의무적이고 영구적인 의무 할당량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난색을 표시했다. EU와 난민 관련 면제 협약을 맺어 할당을 거부할 수 있는 덴마크도 수용을 반대했다. 키프로스와 슬로바키아는 난민 중 기독교도만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독일 내부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여전히 강하다. 메르켈 총리의 연정 파트너인 기독사회당(CSU)의 호르스트 제호퍼 당수는 11일 “난민의 전례 없는 대량 유입은 독일을 오랫동안 괴롭힐 실수”라며 “독일이 곧 통제가 불가능해질 긴급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새로 유입된 난민의 20%가량을 수용하는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하네로레 크라프트 주총리도 메르켈이 난민들에게 독일로 오라는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독일 방송사 N24의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 3명 중 2명이 정부의 난민사태 대응에 부정적으로 답했다.


反이민 주장 극우세력 반사이익 전망도난민과 이민 유입에 반발하는 극우세력의 폭력사태도 그칠 기미를 보이질 않고 있다. 지난 7일 독일 로텐부르크의 한 난민 임시수용소에는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해 6명이 다쳤다. 독일에서는 올해 들어서만 난민이나 난민 수용소에 대한 공격이 200건 이상 발생했다. 영국에서도 올해 무슬림에 대한 증오범죄가 지난해보다 70% 급증했다.


 반(反)이민 정서에 호소하는 유럽 극우주의자들이 득세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마이클 할첼 핀란드국제문제연구소 방문연구원은 “난민 부담이 가중되면 결국 많은 국가에서 극우 민족주의자들이 정치적 수혜를 얻을까 우려된다”고 말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올해 들어 지중해를 통해서만 이미 43만 명의 난민이 유럽으로 들어왔다. 지난해 전체 21만9000명의 배 가까운 수치다.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난민은 2750명이나 된다.


 메르켈의 시리아 난민 ‘묻지마 수용’은 경우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뮌헨역엔 난민들이 들이닥치고 있지만 유럽은 어리둥절한 채 공통 해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메르켈의 말대로 독일만의 힘으론 역부족일 수밖에 없다.


한경환 기자 han.kyunghw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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