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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은 거들뿐?난 영화 맞춤형 컴포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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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호 16면

27일 서울 용산의 작업실에서 만난 영화음악 감독 모그. 2004년 재즈 베이시스트로 데뷔한 만큼 감수성 짙은 음악이 강점이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2010)로 충무로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다큐멘터리 ‘플래닛 비보이’(2007)와 단편 ‘선물’(2009)에서 보여준 감각은 성공적인 안착을 돕기에 충분했다. ‘도가니’(2011)‘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2013) ‘마담 뺑덕’(2014) 등 현대물에서는 구슬프면서도 섬뜩한 분위기를,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상의원’(2014) 등 사극에서는 낭만적이면서도 절제된 음악으로 객석을 집중시켰다. 김지운 감독과 함께 할리우드에 진출해 ‘라스트 스탠드’(2013)를 만들었고 최근에는 전도연 주연의 ‘협녀, 칼의 기억’(2015, 이하 협녀)에서 고전적 미장센에 어우러지는 유려한 선율을 들려주었다. 뉴욕에서 재즈 베이시스트로 활동하다가 현재 가장 주목받는 영화 음악감독이 된 모그(Mowg·이성현·43) 얘기다. ?


‘악마를 보았다’부터 ‘협녀’까지 쉼없이 달려온 느낌이다. 음악감독으로 산다는 건 어떤 건가. “사실 할리우드도 그렇고 영미권에서는 음악감독이라는 단어가 아예 없다. 컴포저(composer)라고 해야 맞는데 우리나라에서만 감독이라는 말을 붙여 희한한 단어를 만들어 냈다. 감독은 원래 영화판에서는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감독 혹은 제작자의 요구대로 음악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다. 영화 음악감독으로 일을 한다는 건 예술가로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들어갈 음악을 하는 것이다. 즉, 최종 목적지가 ‘영화’다. 그래서 음악 전공자들이 영화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할 때 나는 진지하게 조언해 준다. ‘음악’을 하고 싶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자동차로 치면 각 부품의 규격을 맞추는 게 우선이지 거기서 예술적 자아를 펼쳐보이는 것은 우선이 아니라고.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라면 다르겠지만 적어도 상업영화에서는 그렇다.”

일이 많이 힘들고 고되다고 들었다. “상업 영화라면 아무리 저예산이라 해도 보통 30억~40억 원은 들어가지 않나. 덩치가 큰 장르의 예술이기 때문에 어떤 포지션이든 같이 작업하는 사람들과의 이해 관계와 이권 등등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거기에 퀄리티, 스케줄, 마케팅 포인트까지 많은 부분을 고려해 가며 작업해야 되기 때문에 힘든 상황이 늘 생겨날 수 밖에 없다. 엄청난 압박감이 감독의 어깨를 짓누르고 나는 그걸 아주 조금 나눠지는 정도다. 음악적 요구가 많은 감독님들에게는 장면당 10곡도 넘게 준비해 다양한 선택을 돕는다. 어디선가 막 영감을 받아서 작곡하는 게 아니라 정확히 짜인 틀에서 움직인다. 내가 준비한 것보다 시나리오 작가, 연출의 의도가 더 우선이다.” 그래도 음악감독으로서 한 영화의 음악을 책임진다는 자부심이 있지 않나. “김지운 감독님의 경우 시나리오 작업 때부터 서로 상의를 하고 설계를 할 수 있다. 남다른 감수성으로 영화에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만의 인장을 새겨나가는 분인데, 음악감독이 기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공간을 많이 주는 것은 물론 전체적인 방향도 확실히 잡아주신다. ‘악마를 보았다’의 완성도 있는 음악이 나올 수 있었던 건 시나리오 단계부터 장르적으로 극한에 가고 싶다는 감독님의 확실한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판에서 임자를 만나지 못해 오래 떠돌았던 시나리오였고, 그 작품을 하고 싶어하는 감독들이 많았다. 모두 탐내는 야생마 같은 시나리오였으나 잡아탈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거다. 그 고삐를 낚아채 올라탈 수 있었던 유일한 감독이 김지운 감독님이었고, 나는 어렵게 주인을 만난 영화에 약간의 장르적 실험을 통해 서늘하고 깊으며 차갑고 아름다운 느낌을 주려고 했다(‘악마를 보았다’는 보사노바 리듬과 관현악의 차용이 돋보인다). 내가 영화 음악감독으로서 자리 잡게 해준 작품이기도 하지만, 돌이켜 보면 최민식과 이병헌이라는 배우의 조합과 연기적 도전이 빛나는 작품이다. 이런 조합의 영화가 다시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영상이 완벽하면 음악은 빼는 스타일” 김지운 감독의 다음 작품에도 관여하나. “차기작 ‘밀정’의 경우 일제 강점기가 배경인 시대극이니 영화의 성격을 살리며 시대를 어떻게 아우를 지가 고민이다. 예를 들어 ‘라스트 스탠드’ 같은 경우에는 서부영화 플롯을 갖췄으나 액션극으로서의 색다른 모더니티가 있었다. 일종의 장르적 변종인 셈이다. 클래식한 서부영화 리듬에 특별한 현대성이었으니, 레트로한 면과 아주 현대적인 것, 양극단에 있는 느낌이 동시에 느껴질수 있도록, 용광로에 넣어 끓여낸 무엇과 같은 결과물이 필요했다.” 쉽지 않은 과정으로 보이는데 당신이 가장 노력하는 지점은. “뻔한 스타일을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가끔 뻔한 음악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영화 음악은 복잡한 기법, 화성을 쓰거나 실험적 시도를 하는데 리스크가 있다. 영화 음악은 영화를 더 재미있게 해줘야 한다고 봤을 때, 음악으로서 얻는 가치는 때로 제로이거나 심지어 마이너스일 수도 있다. 영화를 살려주고, 필요한 정서를 극대화시키고, 불필요한 정서가 찍혔으면 그걸 눌러버리는 역할을 해야한다. 영상만으로 거의 완벽한 장면이 찍혔으면, 나는 음악을 최소한으로 넣거나 배제하자고 말한다.” 상업 영화에서 영화음악의 역할은 무엇일까. “엔니오 모리코네 같은 이는 당시의 연출 기법이나 영화 사조 덕분에 자신만의 음악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다. ‘죠스’로 유명한 존 윌리엄스나 광선 쏘고 비행선 날아다니는 ‘스타워즈’ 같은 영화의 음악은 또 다른 모양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 전세계를 마켓으로 하는 할리우드 오락영화에는 오히려 예전에 비해 감수성 넘치는 음악이 필요치 않은 경우가 많다. 상업 영화는 오락성이나 설득력을 빼게 되면 상당히 문제가 심각해진다.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이 대상이라면 거기에 맞춰 영화 음악도 보편적인 감수성을 담아야 한다.” 당신의 창작 활동의 목적은 영화인가 음악인가. “이 일은 영화를 사랑해야 할 수 있는 거지, 음악을 사랑하면 못 하는 일이다. 로열티나 저작권에 대해서도 영화 음악이랑 기존 음악은 차별을 한다. 영화 음악은 표제 음악이다. 주제를 던져주고 거기 맞춰 가는 거다. 모든 투자나 제작 프로세스가 시나리오를 보고 이뤄지는 거랑, 오페라나 음악극처럼 음악에서 시작하는 장르랑은 다르다. 스테이크로 하면, 내 역할은 접시와 같은 거다. 끼얹는 소스도 아니고 그저 담아내는 그릇.”

“음악교육 안 받았어도 나만의 방식으로 작업” 지난 5월엔 국립무용단의 작품 ‘적’의 음악도 맡았는데. “영화 음악 외에 내가 종종 하는 작업들은 전혀 다른 지점에 있는 것들이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와도 작업해봤고 국립무용단과도 해봤는데, 무용 음악은 내 음악에 맞춰서 무용수들에게 디렉션을 줄 수가 있다. 그래서 재미있었고, 다시 아티스트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영화에서는 아니다. 이미 모든 장면을 다 찍어놨는데 거기에 내 음악을 맞춰야지, 내가 음악을 이렇게 써놓고 영상을 다시 찍을 수는 없지 않나. 광고 음악은 영화 음악과 비슷한데, 목적이 확실하다. 이런 휴대전화를 얼마쯤 팔고 싶다는 소비자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주고 싶다, 이런 눈에 보이는 목적이 있다.” 음악감독이 하는 일은 결국 무엇인가.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는데, 스턴트맨이나 음악감독이 하는 일은 다르지 않다. 스턴트맨은 그 장면의 효과를 최대화하기 위해 존재하며,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심하게 다칠 수도 있다는 걸 늘 염두에 둔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음악이 구르고, 상처입고, 깨지고, 죽을 수도 있다. 장면을 살리기 위해 나는 내 음악이 죽거나 상처 입고 깨질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가장 정제된 음만을 추구하는 음악과 비루하고 아름답지 않은 것도 담아낼 수 있는 영화는 애초에 성질이 다른 장르의 예술이다.” 재즈 베이시스트로 음악 커리어를 시작했다. 요즘에도 연주를 하나. “그럴 여유는 없다. 이끌고 있는 영화 음악팀도 있고, 연주를 하기에는 스케줄이 녹록지 않다. 20대에는 로드리고와 말러를 무척 좋아했다. 그때는 정서적으로 감수성을 자극할 수 있는, 강렬하고 묵직한 음악에 끌렸다. 이후로는 라벨을 아주 많이 좋아했고, 많이 들었다. 라벨 특유의 서늘한 감수성과 모형을 만들 듯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성해나가는 것이 좋았다.” 음악적으로 재주가 뛰어났었나 보다. “어릴적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따로 음악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귀가 좋은 편이라 4성 정도는 듣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한번 들은 연주를 즉흥으로 받아치는 것도, 코드만 있으면 바로 연주를 하는 것도 어렵게 느꼈던 적이 별로 없는듯 하다. 베이스 연주를 할 시간은 없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여전히 ‘뮤지션’으로 살아가고 있다. 베이스에 첼로 줄을 끼워 내가 원하는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도 만들어 보았다. 치찰음을 내기 위해 현악기 활을 가져와 긁는 소리를 만들어 영화에 쓴 적도 있다. 정통 주법대로 연주하는 연주자들은 잘 접근하지 않는 부분인 듯 하다. 어쩌면 내가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는지도 모른다. 형식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게 새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마일즈 데이비스를 보아도 그렇지 않나. 그는 아주 정석대로 연주하는 트럼페티스트는 아니다. 코어 재즈 팬 중에는 소리를 내는 방식이나 연주력만 따졌을 때 마일즈 데이비스가 과대 평가된 면이 있는 ‘아이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다른 장르와의 협업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장르와 재즈의 퓨전을 시도해 장르적 외연을 넓힌 존재라는 건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말이다.” 모그라는 이름이 특이하다. “『정글북』에 나오는 늑대소년 ‘모글리’에서 따왔다. 뉴욕에서 활동할 때 부르기 쉬운 이름이 필요했다. 럭비선수 출신이라 몸이 크기도 하고, 모글리와 풍기는 에너지가 닮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발음하기도 쉽고 독특하기도 해서 계속 쓰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은. “10월에 김주원(발레리나), 김설진(현대무용가)과 함께하는 프로젝트 퍼포먼스의 음악을 맡았다. 잠시 아티스트로 돌아갈 수 있고 영화 음악을 할 때와는 좀 다른 자유로운 방식으로 예술적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다.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봐도 매우 뛰어난 기량을 지닌 두 무용수와의 만남이라 기대가 된다.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10월 8일 개봉하는 허종호 감독의 ‘성난 변호사’, 연말에 개봉하는 이준익 감독의 ‘동주’(윤동주의 일대를 그린 시대극, 전체 흑백영화), 김지운 감독의 ‘밀정’, 배우 정우성이 제작자로 나서고 김하늘과 주연을 맡은 ‘나를 잊지 말아요’가 있다. 이 작품들을 가장 빛내줄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 그외에 다른 욕심은 없다.” ●


글 김나희 음악평론가 nahui.adelaide.kim@gmail.com,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각 영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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