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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밖으로] 인간의 만남은 아이러니의 만남 그래서 미래는 암흑과 같은 것

중앙선데이

입력

3 처음 만난 날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미치(록 허드슨)와 루시 (로렌 바콜).

더글러스 서크판 막장 드라마의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냉소적 통찰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인간은 ‘아이러니’한 존재라는 성찰이다. ‘아이러니’는 고전적 의미 그대로 말과 행동이 그 의도와는 반대되거나 다르게 드러나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다. 예를 들어보자. 여자가 말한다. “이제 그만 헤어져!” 남자는 당혹스럽다. 그러나 이때 여자의 의도는 다를 수 있다. “결혼하자. 더 이상 진전없는 연애놀이 말고!” 이 의도를 가득 담아 이렇게 아이러니하게 외치는 것이다. “이제 그만 끝내!”

4 더글러스 서크 감독.

뒤죽박죽 복잡한 인간의 욕망 세계
막장 드라마가 성공하는 이유는 우리의 욕망을 찌르는 아이러니의 구조 때문이다. ‘바람에 쓴 편지’를 본 직후에는 그저 막장의 전형적인 전개라고 치부할 수 있다. 그런데 약간의 시간을 보낸 뒤 네 명의 등장 인물을 다시 떠올려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얼마나 순진하게 영화를 봤는지 자각하게 된다. 참고로, 막장 드라마를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의 하나는 가장 싫어하는 캐릭터가 누구인지, 그나마 누구를 옹호하고 싶은지 등 캐릭터의 순위를 매겨 보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아이러니를 다룬 아이러니한 영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주저 없이 더글러스 서크 감독에게 근사한 호칭을 붙인다. 아이러니의 예술가! 아이러니의 테크니션!
서크는 자신의 통찰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염시키기까지 한다. 그렇다. 나도 내 의도와 욕망과는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구나! 나 또한 표리부동한 인간이구나! 이런 통찰을 관객에게 주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이나 독일 뉴시네마의 기수 파스빈더 감독이 서크 감독을 상찬했던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솟아오르는 궁금증. 왜 인간은 이토록 아이러니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을까. 정말로 인간은 아이러니의 저주를 받은 존재일까.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삼각형의 구조로 작동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대상을 직접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중개자를 통해서만 욕망한다는 것이다. 라캉이라면 이것을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미숙해서 벌어지는 현상일 것이다.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하는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인간은 최소 10년, 아니 20년, 심지어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안전한 삶을 확보하려면, 인간은 자신을 돌보아주는 타인들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얻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내가 원한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 내가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일 수 있다. “나는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서크 감독이 보았던 아이러니는 이런 정신분석학적 메커니즘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우리 인간의 욕망은 뒤죽박죽 복잡하기만 한다. 불행히도 어떤 것을 욕망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 욕망이 나의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내 욕망은 혹시 타인의 욕망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나를 사로잡고 있는 욕망이 나의 것인지, 아니면 남의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까.
사실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저 지금 나의 욕망을 관철하면서 좌충우돌할 수밖에. 돌아보라. 지금 당신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정말 당신이 원하는 것인가. 당신의 욕망은 정말 당신의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것인가.
어쩌면 자신의 욕망을 자각할 때까지, 우리는 모두 우스꽝스러운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며 살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내가 만나는 타인들도 마찬가지의 난감한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아이러니한 인간이 아이러니한 인간을 만나니, 미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일 뿐이다. 막장을 극복하지 못한 채 죽어버린 카일이 될 수도, 새로운 막장을 위해 하들리 가문을 떠나는 루시와 미치 커플이 될 수도, 아니면 욕망을 자각하며 막장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시작하는 메릴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서로에게 행운을 빌어줄 일이다, 브라보!

강신주 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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