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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쓴 편지(1956)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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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호 24면

1 하들리 가의 남자들이 떠난 자리에 홀로 앉아 있는 메릴리. 영화의 엔딩 장면이다.

[영화 속에서] 욕망을 좇으며 해피엔딩 갈구 우리네 삶은 영원한 멜로드라마

석유재벌의 상속자 카일 하들리 옆에서 사업을 실질적으로 도맡고 있는 미치 웨인은 유년시절부터 카일의 친구다. 카일은 출장길에서 사업 파트너의 여비서 루시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카일은 재력을 동원해 적극적인 구애를 펼치고 미치는 씁쓸한 눈빛으로 루시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본다. 착실한 가장으로 변모한 카일과 완벽한 내조자로 자리 잡은 루시는 단란해 보이는 결혼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들 곁에는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여전히 고민하는 미치와 미치를 향한 연모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끊임없이 사고를 치는 카일의 여동생 메릴리가 있다.


오늘날 더글러스 서크(1897~1987)의 이름은 멜로 영화와 떼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눈물을 짜내는 멜로물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덴마크 출신이었던 더글러스 서크는 독일에서 연극의 무대감독으로 이름을 알린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43년에 첫 미국영화인 ‘히틀러의 미치광이들’을 선보인다.


그가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것은 10년 뒤의 일이다. 50년대 초 유니버설 픽처스의 전속 감독으로 고용되면서 ‘내가 욕망하는 모든 것’(1953)과 ‘마음의 등불’(1954)을 선보였고 흥행 감독이자 멜로 영화의 대가로 등극한다. 그가 50년대에 유니버설에서 만든 영화는 총 21편이었다.


나약한 재벌 2세와 보통 여자의 만남 ‘바람에 쓴 편지’는 이 시기의 대표작 중 하나다. 원작이 있기는 했지만, 담배회사 R. J. 레이놀즈가의 사연에서 영감을 얻었다. 상류층의 몰락을 다룬 전형적인 멜로물답게 주요 등장 인물은 네 명이다. 재벌가의 상속자인 카일은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나약한 재벌 2세. 반면 카일의 친구이면서 함께 성장한 미치는 묵묵하면서도 일을 잘 수행하는 가난한 집 출신의 남자다. 어느 날 두 사람은 매력적인 여인 루시를 만나게 된다. 루시에게 첫눈에 반한 카일은 열렬하게 사랑을 고백한다. 미치 또한 루시에게 호감이 있지만 카일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한다. 카일의 여동생 메릴리는 미치에게 열정적으로 구애하면서도 남성편력을 과시하는 집안의 문제아다. 모든 문제를 뒤로한 채 카일과 루시의 단란한 결혼생활이 시작된다. 그러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하기 마련이다. 카일은 자신이 불임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놓았던 술병을 다시 붙들기 시작한다. 게다가 아버지의 뜻하지 않은 죽음, 임신한 루시와 미치 사이를 오해하게 되면서 갈등은 점점 커진다. 메릴리는 미치를 향한 연모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새언니와 오빠 사이를 이간질한다.


영화는 재벌가의 도덕적 타락과 그들과 함께 사는 선한 사람들의 갈등을 다루는 멜로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작품의 진정한 묘미는 누구나 지니고 있는 인간적 모순과 한계를 드러냈다는 데 있다. 루시는 “결혼식이 끝나면 도시 근교에서 남편, 아이들, 할부금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라고 말하는 분수를 아는 여성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호텔 방을 거부하던 루시는 결혼을 제안하는 카일에게 끝내 입술을 허락한다. 그녀의 욕망은 소박한 것이 아니라 결혼을 향한 전형적인 중산층의 판타지에 가깝다. 미치 또한 카일의 행동을 혐오하면서도 그의 곁에서 모든 것을 돌보는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 루시를 향한 사랑과 카일과의 우정 사이를 방황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2 영화 ‘바람에 쓴 편지’포스터.


무엇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더글러스 서크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와 가치라는 것이 얼마나 통합되기 어려운 것인가를 즐겨 다뤄 왔다. 메릴리는 미치를 원하고, 미치는 루시를 갈망하며, 루시는 카일을 선택하고, 카일은 아버지의 사랑을 원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카일의 친구 미치를 아들보다 신뢰한다. 영화는 원하는 대상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얻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멜로드라마의 보편적 운명을 그려낸다. 50년대 미국인들은 전쟁 동안 석유산업으로 벼락부자가 된 이들의 몰락을 보며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한다. 오늘날의 관객들에게 이러한 감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치 역의 록 허드슨이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사실도, 루시 역의 로렌 바콜이 험프리 보가트와 결혼했다는 뒷이야기도 캐릭터에 대한 반감을 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인생은 엇갈리게 마련이고, 텅 빈 공허의 순간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멜로 영화의 메아리다. 카일이 총으로 사고를 맞이하던 날 밤, 카메라는 텅 빈 집안을 뒹구는 낙엽을 보여준다. 초반부에 펼쳐지는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멜로의 거장이 전하는 통속성의 통찰을 단박에 엿볼 수 있다. 자본과 도덕은 물론이고 사랑마저도 끝내 우리를 구원하지는 못할 것이니, 인간의 삶은 헛된 욕망을 좇으면서도 끝내 해피엔딩을 추구하고야 마는 영원한 멜로드라마다.


이상용 영화평론가


[영화 밖으로] 인간의 만남은 아이러니의 만남 그래서 미래는 암흑과 같은 것

3 처음 만난 날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미치(록 허드슨)와 루시 (로렌 바콜).


더글러스 서크판 막장 드라마의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냉소적 통찰이 똬리를 틀고 있다. 인간은 ‘아이러니’한 존재라는 성찰이다. ‘아이러니’는 고전적 의미 그대로 말과 행동이 그 의도와는 반대되거나 다르게 드러나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다. 예를 들어보자. 여자가 말한다. “이제 그만 헤어져!” 남자는 당혹스럽다. 그러나 이때 여자의 의도는 다를 수 있다. “결혼하자. 더 이상 진전없는 연애놀이 말고!” 이 의도를 가득 담아 이렇게 아이러니하게 외치는 것이다. “이제 그만 끝내!”

4 더글러스 서크 감독.


뒤죽박죽 복잡한 인간의 욕망 세계 막장 드라마가 성공하는 이유는 우리의 욕망을 찌르는 아이러니의 구조 때문이다. ‘바람에 쓴 편지’를 본 직후에는 그저 막장의 전형적인 전개라고 치부할 수 있다. 그런데 약간의 시간을 보낸 뒤 네 명의 등장 인물을 다시 떠올려보라.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얼마나 순진하게 영화를 봤는지 자각하게 된다. 참고로, 막장 드라마를 재미있게 즐기는 방법의 하나는 가장 싫어하는 캐릭터가 누구인지, 그나마 누구를 옹호하고 싶은지 등 캐릭터의 순위를 매겨 보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영화는 아이러니를 다룬 아이러니한 영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주저 없이 더글러스 서크 감독에게 근사한 호칭을 붙인다. 아이러니의 예술가! 아이러니의 테크니션!


서크는 자신의 통찰을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염시키기까지 한다. 그렇다. 나도 내 의도와 욕망과는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고 있구나! 나 또한 표리부동한 인간이구나! 이런 통찰을 관객에게 주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프랑스 누벨바그 감독들이나 독일 뉴시네마의 기수 파스빈더 감독이 서크 감독을 상찬했던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솟아오르는 궁금증. 왜 인간은 이토록 아이러니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을까. 정말로 인간은 아이러니의 저주를 받은 존재일까.


르네 지라르는 “인간의 욕망이 삼각형의 구조로 작동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떤 대상을 직접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중개자를 통해서만 욕망한다는 것이다. 라캉이라면 이것을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미숙해서 벌어지는 현상일 것이다. 태어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독립하는 다른 생명체들과는 달리 인간은 최소 10년, 아니 20년, 심지어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안전한 삶을 확보하려면, 인간은 자신을 돌보아주는 타인들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얻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내가 원한다고 믿었던 것이 사실 내가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일 수 있다. “나는 나의 욕망이 아니라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서크 감독이 보았던 아이러니는 이런 정신분석학적 메커니즘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이렇듯 우리 인간의 욕망은 뒤죽박죽 복잡하기만 한다. 불행히도 어떤 것을 욕망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 욕망이 나의 것인지 아니면 타인의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내 욕망은 혹시 타인의 욕망이 아닐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나를 사로잡고 있는 욕망이 나의 것인지, 아니면 남의 것인지 확인할 수 있을까.


사실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저 지금 나의 욕망을 관철하면서 좌충우돌할 수밖에. 돌아보라. 지금 당신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정말 당신이 원하는 것인가. 당신의 욕망은 정말 당신의 것인가, 아니면 타인의 것인가.


어쩌면 자신의 욕망을 자각할 때까지, 우리는 모두 우스꽝스러운 막장 드라마를 연출하며 살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내가 만나는 타인들도 마찬가지의 난감한 상황 속에서 살아간다. 아이러니한 인간이 아이러니한 인간을 만나니, 미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암흑일 뿐이다. 막장을 극복하지 못한 채 죽어버린 카일이 될 수도, 새로운 막장을 위해 하들리 가문을 떠나는 루시와 미치 커플이 될 수도, 아니면 욕망을 자각하며 막장에서 벗어나 다른 삶을 시작하는 메릴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서로에게 행운을 빌어줄 일이다, 브라보!


강신주 대중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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