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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람] "강의가 내겐 보약이자 운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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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후학들을 가르치는 게 저한테는 보약도, 운동도 되는 모양입니다. 좀 피곤하다 싶다가도 초롱초롱한 눈빛의 학생들 앞에만 서면 힘이 절로 솟는 걸요. 앞으로요? 글쎄 욕심 같아선 20년은 더 강단에 있고 싶은데요."

77세를 '희수(喜壽)'라고 한다. 글자 그대로 풀면 '기쁜 나이'라는 뜻. 하지만 이 나이까지 살았다고 무조건 기쁘지만은 않을 터. 병에 걸려 자리보전이라도 하고 있는 노인들의 입에서는 "그저 늙으면 죽어야 하는데…"라는 한탄이 나오게 마련이다.

평생을 과학지식의 대중화에 힘써온 '과학 전도사' 김정흠(金貞欽.77.물리학)박사. 그런 면에서 그는 정말로 '기쁜 나이'를 살고 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번 학기에 경희대 학부생 교양과목인 '현대물리의 이해' 등 3개 대학에서 무려 주당 27시간을 맡고 있다. 이 정도 수업이면 중.고등학교 교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

비단 이번 학기뿐 아니다. 金박사는 1953년부터 재직해 온 고려대에서 92년 정년퇴임을 한 뒤 젊은 학자들도 '보따리 장사'라며 기피하는 시간강사도 마다하지 않고 꾸준히 '강의욕심'을 부리고 있다.

"세어 보면 지금까지 가르친 학사는 수천명이 되고 석.박사는 4백명 정도 될 것 같습디다. 이 정도면 지겨울 때도 된 것 같은데 아직도 계속 가르치고 싶어요. 이번 학기에도 좀 무리하게 수업을 맡았더니 매주 목요일이면 점심 먹을 시간이 없어 강사 대기실에서 도시락을 먹고 강의실로 뛰어갑니다."

수업의 양에만 욕심을 내는 것이 아니다. 金박사는 학생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열정적인 수업으로도 유명하다. "학생들 사이에 엄한 교수님으로 소문이 났더라"고 운을 떼자 그는 대뜸 학기 초에 수강생들에게 쓰게 하는 서약서 양식 한부를 꺼내 보여 주었다.

A4 용지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은 서약서에는 '수업 중에 휴대전화를 사용하면 팔굽혀펴기 20회를 실시한다''지각하면 팔굽혀펴기 10회를 한다' 등의 조항이 가득했다.

"제자들은 선생에 대해 예절을 지켜야 합니다. 그게 교육의 근본이죠. 물론 저도 깜빡 잊고 있다 휴대전화가 울리면 주저없이 팔굽혀펴기를 합니다. 학생들의 양해를 얻어 규정의 10%만 하지만(웃음)."

60년대부터 과학이 상식으로 자리잡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벌여온 활발한 집필활동도 여전한 듯했다. 인터뷰 중에도 원고청탁 전화가 몇차례 걸려와 대화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는 지난 세월 동안 과학잡지는 물론 학생잡지.어린이 신문.일간지의 주요 필진 중 하나였다. 특히 그가 80년대 초반 '소년중앙' 등에 연재했던 21세기에 관한 칼럼들은 어려운 과학용어들을 쉽게 풀어내는 데다 어지간한 SF소설보다 더 재미있기까지 해 어린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의 글을 읽고 자란 지금의 20~30대들은 '들고 다니는 컴퓨터'가 노트북으로, '들고 다니는 개인 전화기'가 휴대전화로 실용화하는 것을 보며 金박사를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

"단순한 흥미 차원이라고 해도 과학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이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야 과학에 투자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산업도 발전할 수 있죠. 과학의 대중화는 곧바로 국가경쟁력으로 이어집니다. "

대화 막바지, 문득 金박사의 컴퓨터 실력이 궁금해졌다. 개인용 컴퓨터부터 인터넷의 등장까지 미래사회에 대해 정확한 예측을 해온 그인 만큼 나이에 상관없이 '인터넷 매니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무슨 회의에 참석해봐야 한다"며 서둘러 짐을 챙기는 노(老) 물리학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대답은 의외였다.

"허허… 나 '컴맹'이오. 사람들 앞에서 이 얘길하면 전부 고개를 갸웃하지. 근데 매일 같이 가르쳐야 할 학생들이 줄을 섰고 써야 할 원고들이 산더미다 보니 익힐 시간이 없었어요. 게다가 다(多) 대 다 쌍방향 매체라는 점에서 인터넷은 놀라운 발명품이지만 부정확한 지식을 유포하는 등 문제도 많아요. 그래서 저는 대신 책을 읽죠. 젊은 시절부터 제 수입의 10%를 꼬박 책을 사는 데 써왔습니다. 책! 그거 좋은 겁니다. 기자양반도 열심히 읽으쇼!"

글=남궁욱, 사진=최정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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