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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메르스 국감도 하기 전에 백서부터 내겠다는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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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예방도 대응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치유와 회복마저 엉터리로 해서는 안 됩니다.”

 18일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국가방역체계 개편 방안 관련 공청회’ 청중석에 있던 한 의대 교수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의료진은 밤새 진료했고 일반인 1만6000명이 격리됐다. 책임 있는 당국자가 사과하고 국민 상처를 보듬는 세리머니(의식)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치유와 회복은 실패 원인 규명과 재발 방지책 마련을 말한다. 실패 연구는 ‘징비(懲毖)’의 과정이다. 조선 선조 때 재상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전 과정을 『징비록』으로 남겼듯이 메르스의 잘잘못을 따져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복지부는 12일 백서 발간 관련 민관합동자문회의를 개최했다. 앞으로 두세 차례 회의를 더 연 뒤 백서를 내겠다고 한다. 자문회의 도움말, 보건사회연구원의 ‘메르스 대응 평가와 제안 용역보고서’를 바탕으로 복지부 메르스 후속조치 추진단이 이를 만들고 있다. 원래 이달 말에 마무리하려 했으나 자문회의에서 말려 한 달 늦췄다고 한다.

 정부는 지난달 28일 사실상의 메르스 종식 선언을 했다. 그 선언문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백서를 내놓을 모양이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 지역을 강타했을 때 미국은 1년 반의 시간을 들여 약 600쪽짜리 백서를 내놨다. 9차례 공청회를 열었고 50만 쪽 이상의 서류를 검토했다. 2009~2010년 신종플루 때는 5~6개월 뒤인 2010년 11월에 백서가 나왔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18일 학계·의료계·시민단체·환자단체 등으로 구성된 ‘메르스 극복 국민연대’가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단체 소속 서울대 의대 김윤(의료관리학) 교수는 “ 초기 방역 실패를 초래한 복지부가 자기 잘못을 정확하게 진단할지 의구심이 든다.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백서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이날 공청회에서 복지부는 책임을 회피하는 듯한 자세를 보였다. 병원 정보 늑장 공개에 대한 비판을 받자 권준욱 공공보건정책관은 “복지부와 함께 전문가들도 관련 역할과 발언이 있었다. 공무원들뿐 아니라 전문가들도 흔들린 측면이 있다”고 전문가 책임을 거론했다. 권 국장은 역학조사관과 감염내과 의사의 수가 적은 것에 대해 “의료계도 통렬하게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전문가도 메르스 대응 실패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제3자가 지적하면 모를까 복지부가 나서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복지부는 질병관리본부(이하 질본)를 지금처럼 산하기관으로 두려 한다. 권 국장은 “죄(방역 실패) 지은 사람이 보건부 독립이나 질병관리청 승격을 얘기 못한다. 질본을 차관급 기관(현재는 1급)으로 격상하면 감지덕지”라고 말했다. 복지부의 다른 관계자는 "기억이 생생할 때 서둘러서 백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둘러댔다. 복지부 자세가 이러한데 객관적인 징비록이 나올 수 있을까. 울산대 의대 이상일(예방의학) 교수는 “머지않아 실시될 국정감사, 감사원 감사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날 텐데 그걸 무시하고 이렇게 서둘러서 백서를 만들면 안 된다. 어떻게 하든 메르스를 빨리 덮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는 게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고 지적했다. 이대로 가면 치유와 회복은커녕 상처 수습도 어렵다.  

신성식 복지전문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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