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속으로] 살충제 사이다, 낙지 살인, 그리고 시신 없는 살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미스터리 소설 같은 ‘상주 사이다 사건’ 이 법원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지난달 14일 경북 상주시 공성면 금계1리 마을회관에서 할머니 6명이 살충제가 든 사이다를 나눠 마시고 그 중 2명이 숨진 사건입니다.

검찰은 사건 당일 마을회관에 피해 할머니들과 같이 있었으면서 유일하게 사이다를 마시지 않은 박모(83) 할머니를 살인 및 살인 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겼습니다. 살해할 의도를 갖고 사이다에 살충제를 사이다에 섞어 할머니 2명을 살해하고 다른 4명 역시 거의 살해할 뻔 했다는 겁니다.

검찰이 제시한 주요 증거들은 이렇습니다.

-박 할머니 집에서 살충제 약병이 나왔다.

-집에 뚜껑 없는 박카스 병도 있었으며, 안에서 살충제 성분이 검출됐다.(살충제가 든 1.5L 사이다병은 원래 뚜껑 대신 박카스 뚜껑이 닫혀 있었음)

-박 할머니 옷 이곳저곳과 전동휠체어ㆍ지팡이 등 21군데에서 살충제 성분이 검출됐다.

-쓰러진 할머니들과 한 시간 동안 같이 있었으면서도 신고하지 않았다.

-처음 달려온 구급차가 마당에 나와 쓰러진 신모(65) 할머니 한 명만 발견하고 태워갔을 때, 박 할머니는 마당에 있었으면서도 안에 5명이 더 쓰러져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사건 전날 피해자 민모(84) 할머니와 화투놀이를 하다 크게 다퉜다. 화가 난 민 할머니가 화투 패를 내던질 정도였다.(범행 동기)

-사건 당일, 평소에 가지 않던 민 할머니 집에 가서 마을회관에 가는 지 확인했다.(범행 대상이 마을회관에 가는 지 알아보고 사이다에 살충제를 탔다는 의미)

박 할머니와 변호인은 대해 이렇게 반박합니다.

-범인이라면 살충제 병을 집에 놔뒀겠는가. 누군가 갖다 놓은 것이다. 같은 종류 살충제 병이 피해 할머니 집에서도 나왔다.

-옷 등에 살충제 성분이 묻은 것은 쓰러진 할머니들 입의 거품을 닦아줬기 때문이다.

-혼자 일부러 사이다를 안 마신 게 아니다. 쓰러진 할머니들과 한 시간 동안 같이 있던 것도 아니다. 할머니들이 사이다를 마시고 쓰러진 뒤에 도착했다. 다른 할머니들이 자고 있는 줄만 알았다.

박 할머니 측은 또 “직접 증거가 없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직접 증거는 범인이 살충제를 사이다에 타는 장면이 찍힌 CCTV 영상이라든가, 살충제 병과 사이다 병에 범인의 지문만 묻어 있는 것 처럼 범죄 행위를 바로 입증해주는 증거들입니다. 하지만 검찰과 경찰은 이런 증거는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모두 ‘간접 증거’일뿐입니다.

그렇다면 법원은 이를 어떻게 판단할까요. 상주 사이다 사건 처럼 간접 증거만으로 재판을 진행한 유명한 사건이 둘 있습니다. 바로 ‘낙지 살인’과 ‘시신 없는 살인’입니다.

①낙지 살인=2010년 4월 김모(32)씨가 여자친구 윤모(당시 22세)씨와 인천의 한 모델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안주는 산낙지 네 마리였습니다. 1시간 뒤 김씨가 모텔 프런트에 전화했습니다. “여자친구가 숨을 쉬지 않는다. 119에 신고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병원에 옮겨진 여자친구는 잠시 맥박이 회복되는 듯했으나 결국 숨졌습니다.

남자친구 김씨는 “여친이 낙지를 먹다가 목에 걸려 질식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김씨를 살인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자신이 수익자로 된 여친의 생명보험금을 노리고 살해한 뒤 낙지에 질식한 것으로 위장했다는 겁니다. 이 때도 직접 증거는 없었습니다.

1심에서는 무기징역이 나왔습니다. 근거는 이랬습니다. “질식사 했다는데 사망자가 평온한 표정으로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신용불량자로 소득이 없던 김씨가 지인들에게 ‘돈 나올 곳이 있다’는 취지로 얘기했다(보험금을 노렸다는 뜻).”

고등법원과 대법원은 반대로 무죄 판결했습니다. 코와 입을 막아 살해했다면 당연히 있어야 할 저항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다가, 질식해 의식을 잃고 쓰러질 때 얼굴 표정이 펴지게 돼 편히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보험에 대해서는 “김씨가 보험 내용을 잘 모르는 상황이어서 보험금을 타내려고 치밀하게 계획했다고 보기 힘들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면서 법원은 “유죄로 판단하려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고한 증명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②시신 없는 살인=2011년 한 여성이 경찰에 제보 전화를 했습니다. 한때 동거했던 박모(44)씨가 2008년 동업자 조모(당시 37세)씨를 땅에 파묻어 숨지게 했다는 거였습니다. 조씨가 “투자한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사기죄로 고소하겠다”고 하자 주먹으로 때려 실신시킨 뒤 굴삭기로 구덩이에 묻었다는 겁니다. 여성은 “2008년 어느 날 박씨가 갑자기 ‘중국으로 가자’면서 범행을 털어놨다”고 했습니다.

당시 조씨는 실종 상태로 종적이 묘연했습니다. 검거된 박씨도 처음엔 범행을 시인했습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자 박씨는 혐의를 전면 부인했습니다. “수사기관에서 ‘자백하면 15일간 자유를 주겠다’고 해 허위 진술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신도 없고 직접 증거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법원은 최종적으로 유죄 판결했습니다.

이유가 몇 가지 있었습니다. 우선 피고 박씨가 실종된 조씨의 옷을 불태웠다는 점입니다. 법원은 이를 ‘실종이 아니라 사망해 돌아올 수 없음을 알고 한 행위’로 여겼습니다.

거의 매일 만나던 동업자가 사라졌는데도 박씨가 찾지 않은 점도 법원은 정상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박씨는 또 중국행을 지나치게 서두르기도 했습니다. 매입한 지 15일 밖에 안되는 차량을 서둘러 되팔아치우면서까지 중국으로 갔습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 법원은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판단했습니다. 결론은 징역 13년이었습니다.

낙지살인과 시신 없는 살인. 두 사건 모두 살충제 사이다 사건 처럼 직접 증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낙지살인은 무죄, 시신 없는 살인은 유죄였습니다. 키워드는 ‘합리적 의심’입니다. 그렇다면 살충제 사이다 사건은 어떨까요. 전문가들 의견도 엇갈립니다. 견해를 들어보니 대구지검 부장검사 출신인 홍준영 변호사와 대구변호사협회 홍보이사인 장영수 변호사는 “직접 증거가 없어 유죄 입증이 어려울 수 있을 것 같다”는 쪽이고, 법무법인 이인의 김경진 대표변호사는 “살충제가 여기저기 묻어 있고, 범행 동기에 대한 주민들의 구체적 진술도 여럿이어서 재판부가 간접 증거의 증명력을 높이 살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요.

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v
[사진 프리랜서 공정식]

관련기사
살인 없는 살인 사건 또?…'살충제 사이다' 내일 선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