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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남한 손님맞이 … 김일성 은밀, 김정일 실리, 김정은 아직 주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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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깜짝 등장이나 극적인 반전은 없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93) 여사 방북을 초청해 놓고도 김정은(31)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나타나지 않은 겁니다. 서울행 비행기 시간을 늦추게 한 뒤 벼락치기 면담이라도 할 것이란 막판 기대도 빗나갔죠.

 북측의 홀대는 지난 5일 평양 도착 때 감지됐습니다. 순안공항에 영접을 나온 맹경일 북한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은 이 여사를 맞기엔 격이 떨어지는 대남 실무 책임자인데요. 환영 만찬마저 맹경일이 주재함으로써 ‘더 이상 높은 의전은 기대 말라’는 메시지를 드러낸 셈이죠. 공항 의전보다 한 급 정도 높은 인물이 호텔 또는 회담장에서 손님을 맞고 식사를 내는 게 남북 간 불문율입니다. 김정은이 직접 만날 요량이라면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 등 비중 있는 인물을 내보냈을 겁니다.

 노동신문은 6일자 4면 맨 아래에 ‘남조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일행 도착’이란 두 문장짜리 기사로 다뤘습니다. 귀환 소식도 9일자 4면 하단에 단신 처리됐습니다. 1면엔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북한 선수에게 김정은이 축하 전문을 보낸 소식이 크게 실렸죠.

 김정은의 결례는 2013년 전미농구협회(NBA) 출신 데니스 로드먼 방북 때와 대조됩니다. 그해 2월과 9월 평양을 찾은 로드먼에게 성대한 만찬을 베풀고, 부인 이설주까지 데리고 경기를 관람했죠. 당시 김정은은 “아무 때나 찾아와 휴식도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라”고 말했습니다. 이희호 여사 초청 친서 문맥과 거의 일치하는데요. 반미(反美) 기치 속에서도 미 프로농구 선수는 각별히 예우하고, 아버지(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파트너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을 외면하자 비판 여론이 번진 겁니다.

 3대 세습을 거치며 북한 최고지도자의 남한 손님맞이도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경우 대남 통일전선전술에 초점을 맞췄는데요. 1972년 7·4 공동성명 직전엔 밀사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만났죠. 대남 공세가 절정에 이른 89년 3월에는 문익환 목사를 접견했고 7월엔 임수경 전대협 대표를 만났죠. 문 목사의 경우 공항에 정준기 부총리가 영접을 나오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죠. 정영태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통일이 북한 주도로 가능한 듯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불법 입북을 기획하고, 김일성 면담 사실 공개로 남한을 흔들려 시도한 것”이라고 진단합니다.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 뒤에는 은밀한 초청 면담이 이뤄졌는데요. 91년 5월 운동권 출신 김영환씨가 밀입북해 김일성과 면담한 게 대표적입니다. 하지만 이후 대남 통일전선전술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남북 경협 쪽으로 방향을 돌립니다. 김우중 대우 회장이 90년대 초까지 김일성을 20여 차례 만난 것도 이런 맥락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했고, 임동원·박재규·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과의 공개·비공개 특사 면담을 치렀죠.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발 같은 경협은 물론 대북 식량·쌀 지원 같은 실리 챙기기 쪽에 무게가 실렸다는 평가입니다.

 눈길을 끄는 건 ‘수령’(김일성과 김정일을 지칭)을 만난 남측 인사를 깍듯하게 대하던 관행이 깨진 대목입니다. 더 이상 수령의 남한 인사 선구안이 ‘절대적이고 무오류’가 아니게 된 겁니다. 2002년 5월 방북해 김정일과 만난 박근혜 대통령(당시는 미래연합 대표)을 북한 관영매체가 극렬하게 비난하는 건 김일성 시대에는 상상 못할 일이죠.

 김정은은 아직 남측 인사를 맞을 마음의 채비가 되지 않은 듯합니다. 이 여사에게 정부가 힘을 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란 주장도 있지만 부차적이란 얘기입니다. 한·미 당국은 “김정은이 대남·대외 관계에 관심도 능력도, 경험도 없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고 정부 당국자는 귀띔합니다.

 북한도 이희호 여사 홀대에 따른 남한 내 비판 여론에 고심하고 있을 겁니다. 베테랑 선전·선동가인 김기남 당 비서가 주춤하는 사이 김여정(27) 부부장이 오빠 김정은의 후광을 등에 업고 전면에 나서고 있는데요. 인터넷은 물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까지 들여다보며 김정은 이미지 만들기를 챙기고 있다고 합니다. 북한 선전 매체가 지난 8일 보도에서 이 여사 초청 주체를 김정은이 아닌 ‘우리’(북한)라고 뭉뚱그린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보이는데요. 광복 70주를 앞두고 기대를 모은 이 여사 방북 카드가 불발되고 남북 관계는 곳곳에 지뢰밭입니다. 서방 유학파인 김정은 제1위원장이 서울 손님을 자신감 있게 맞을 날이 오기를 기대해봅니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 부소장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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