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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문외한에 금배지는 문제 … 비례도 투명 공천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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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호 06면

김상곤(오른쪽 두번째) 새정치민주연합 혁신위원장이 지난달 26일 국회에서 비례대표제 등을 포함한 ‘5차 혁신안’을 발표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한국의 비례대표제가 정치개혁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낙하산’에 불과한 비례대표를 아예 없애자는 극단의 주장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수를 늘려 의견의 다양성을 꾀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권역별 비례대표제에 대해서도 정치권의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시동 걸린 정치개혁] 비례대표제 무엇이 문제인가

정치 전문가 대부분은 비례대표제도를 활성화하기 위해선 공천 과정의 투명성을 선결 과제로 꼽았다. 신율(정치외교학과) 명지대 교수는 “공천 방식을 바꾸지 않는 상태에서 비례대표 숫자만 늘리면 제왕적 정당 대표를 만드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현직 비례대표인 최민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정치에 뜻도 없는 사람들이 갑자기 신데렐라처럼 배지를 다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선발 과정에서 공개 토론과 면접, 비례대표 배심원제 등 도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윤성이(정치외교학과) 경희대 교수는 “독일은 비례대표를 선발하는 전 과정을 녹취해 선관위에 제출한다. 또 유권자들이 정당에만 투표하는 게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 명단에 직접 낙점해 선출케 하는 나라들도 있다”고 말했다.

비례대표 의원들은 정책 실현에 보다 의정활동의 무게가 실리길 희망했다. 김기준 새정치연합 의원은 “전문성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 해도 개인 차원에선 한계가 있다”며 “결국 당이 정책정당으로 탈바꿈해 정책 실현에 힘을 쏟아야 비례대표도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창식 새누리당 의원은 “초선들은 국회가 돌아가는 흐름을 잘 모르니 국회사무처 차원에서 입법 과정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남인순 새정치연합 의원은 “지역구 의원들은 자기 지역에 가서 충분히 선전할 기회가 있지만 전국 대상의 정책을 다루는 비례대표들은 언론에서 안 다뤄주면 사실상 활동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현재 비례대표제 개혁의 화두는 권역별 비례대표제다. 지난 2월 발표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방안과 새정치연합 혁신위원회가 지난달 26일 발표한 개혁안은 모두 지역구와 비례대표 비율을 2대1로 설정한 후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누고 권역별로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 수를 배정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 경우 두 방안 모두 비례대표 수가 현행 54명에서 100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강원택(정치외교학부) 서울대 교수는 “지금까지는 비례대표 수가 적기 때문에 누가 되느냐는 국민 관심 밖이었다”며 “수를 늘린다면 선정 과정에 국민의 관심이 모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수제보다 합의제가 진보된 체제”
권역별 비례대표제는 기본적으로 합의제 민주주의와 깊은 연관을 가진다. 통상 합의제 민주주의란 독일·스웨덴 등 중·북부 유럽 국가처럼 선거에서 과반 다수당이 없어 여러 당이 연립정부에 참여해 정당 간 합의로 국정을 운영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런 나라들은 비례대표제를 선거의 근간으로 삼아 정당 지지율에 따라 의석을 배정한다. 이 제도 아래에선 소수 정당도 의회에 입성할 수 있기에 다당제 정치체제가 형성된다.

 반면 한국을 비롯, 영국과 상당수 영연방 국가, 미국 등은 지역구 중심의 단순 다수제를 채택했다. 승자독식 시스템이기 때문에 소수당 진입이 어려워 보수·진보의 양당제 의회가 형성된다.

비례대표제에 기반한 합의제 민주주의는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영연방 국가 중 뉴질랜드가 다수제에서 1994년 독일식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로 선거제도를 개혁했고 현재 캐나다에서도 제도 변경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모두 양당제의 폐해를 경험한 국가다.

 최근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 논의가 활발해지면서 합의제 민주주의를 하나의 대안으로 주목하는 시도가 늘고 있다. 현재호 전 고려대 강사는 최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4개국을 비교 분석한 최근 논문을 통해 합의제 민주주의 국가의 소득 불평등과 빈곤율, 복지 등 공공정책의 성과가 단순 다수제 국가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최태욱(국제학과) 한림국제대학원대 교수도 “비례대표제를 근간으로 한 합의제 민주주의는 OECD 내에서도 대부분의 국가가 채택한 ‘글로벌 스탠더드’”라며 “독일·네덜란드·스웨덴 등과 같은 ‘복지자본주의’로 나아가는 토대”라고 강조했다.

“타협 문화로 합의제 정치 이끌어야”
그러나 비례대표제의 개선이 한국 정치의 잘못된 관성을 과연 고칠 수 있을지에 대해선 아직까진 물음표다. 윤성이 교수는 “벨기에·네덜란드처럼 한 나라 안에서 언어나 종교가 분할된 경우 합의제 민주주의가 유용하지만 한국에서는 지역주의가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강원택 교수도 “지역별로 갈라놓고 (비례대표를) 뽑게 되면 전국보다는 특정 지역의 이해관계만을 대표하려는 성향을 강하게 가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국영(정치외교학과) 성균관대 교수는 “권역별 비례대표를 겨냥해 지역에 기반을 둔 신당 창당 움직임이 가속화될 수 있다”며 “특정 정당에 대한 지역 몰표가 나타나 지역주의 해소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권역별 비례대표제에 대한 각 당의 입장이 극명히 갈리는 점도 그런 우려를 거둘 수 없게 한다. 신율 교수는 “야당과 군소정당은 의석 수 확대를 위해 찬성을, 새누리당은 의석이 줄기 때문에 반대한다. 실질적 의도가 당리당략인데 여론의 호응을 얻기는 힘들 것”이라고 비판했다.

저명한 비교정치학자인 조지 체벨리스 미국 미시간주립대 교수는 “어떤 제도도 조건에 따라 바람직할 수도, 치명적일 수도 있다”며 “합의제 정치가 도입되고 또 효과를 발휘하려면 무엇보다 정치권 내부에서 타협의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특별취재팀=이충형(팀장)·천권필·추인영 기자, 윤수정(연세대 정치외교4)·조희형(이화여대 언론정보4)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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