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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공무원 임용자 질병자료 수집 논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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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가정보원과 경찰 등이 최근 공무원임용 예정자에 대한 신원조사 과정에서 광범위한 질병 자료를 수집중인 것으로 15일 확인됐다. 특히 성형·미용 수술 등 비보험진료를 제외하고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모든 질병이 수집 대상이어서 지나친 사생활 침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난 4월 국정원은 국정원법의 하위규정인 보안업무규정 및 그 시행규칙을 전부 개정하면서 공무원임용예정자의 신원을 조사하기에 앞서 받는 개인정보제공동의서의 서식을 변경했다. 이전엔 일반적인 개인정보 제공동의서와 민감정보 제공동의서로 구분해 받았던 것을 하나의 서식으로 통합했다. 문제는 국정원이 새 서식에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보유한 ‘질병자료’를 수집 대상 민감정보 중 하나로 끼워넣은 것이다. 민감정보란 잘못 다뤄질 경우 사생활을 침해할 우려가 커 개인정보보호법이 수집과 처리를 엄격히 제한하는 정보를 말한다.

질병자료는 사상ㆍ신념ㆍ정치적 견해ㆍ성생활 등에 관한 정보와 함께 여기에 포함된다.

개정 서식의 정보제공 동의여부 표시란 앞에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정보 제공동의를 거부할 수 있다. 다만 거부할 경우 신원조사를 진행할 수 없어 공직임용 등에 제한을 받을 수 있다”고 적혀있다. 공무원 임용을 바라는 사람이 동의를 거부하기란 불가능해 사실상의 강제조치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본지가 보안업무규정과 새 서식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했더니 수집 대상이 되는 질병의 종류, 발생 시점 등에 제한이 없었다. 우울증 등 정신과적 질환에 대한 치료이력은 물론이고 임신과 출산, 성병 등 사생활과 밀접한 진료 내역일지라도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라면 모두 수집대상이었다. 동의서의 효력이 언제까지 유효한지와 조회 횟수·시기 등의 제한 여부도 불명확했다.

보안업무규정 시행규칙에 따르면 국정원이 직접 신원조사를 담당하는 공무원 임용예정자는 중앙행정기관의 3급 이상, 판ㆍ검사, 국ㆍ공립대의 총장 및 학장 등이다. 군인이나 방위사업체 종사자에 대해서는 국방부가, 나머지 공무원에 대한 신원조사는 경찰이 담당한다.

국정원과 경찰의 신원조사 결과는 채용을 진행하는 기관에 따라 면접 이전에 받아 심층면접 대상자를 분류하는 데 활용하거나 최종합격자에게 합격취소사유가 있는지를 판단하는 근거자료로 활용된다.

실제로 신원조사를 근거로 합격이 취소되거나 심층면접에서 불합격한 공무원시험 응시자가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변경된 개인정보동의서식에 따른 신원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대규모 공무원 임용시험은 이달 23일부터 면접이 진행되는 순경공채시험이다. 한해 3차례씩 치러지는 순경공채에는 시험마다 6만여명이 응시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수험생활 중 앓기 쉬운 우울증이나 강박증을 지닌 수험생들이 일부러 치료를 기피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경미한 강박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는 한 경찰시험 준비생은 “이제 부터라도 비보험 진료를 받을 생각”이라며 “정신과 병원의 문턱이 더 높아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변경된 서식 자체가 개인정보보호법에 위반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임지봉 교수는 “업무의 성격을 가리지 않고 모든 임용예정자를 상대로 질병정보를 강제 수집하는 것은 개인정보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개인정보보호법 위반은 물론 위헌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신권철 교수는 “시행규칙 상에 질병자료를 조사대상으로 한다는 명시가 없음에도 서식만 개정해 질병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위법"이라며 "현재의 질병유무가 아닌 과거의 병력을 신원조사 항목으로 두는 것은 사생활 침해 요소가 크다”고 말했다.

이같은 우려에 대한 국정원과 경찰의 입장은 엇갈렸다. 국정원 관계자는 “향정신성 질환과 법정 전염병 유무 및 직무수행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중대 질환에 대해서만 공단에 자료를 요청한다”며 " 신원조사 목적으로만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질병 정보가 신원조사과정에서 꼭 필요하다고 보지는 않는다"며 “국정원에서 서식을 변경해 그렇게 쓰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임장혁ㆍ채승기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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