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평화 오디세이 릴레이 기고

(3) 한반도, 해양의 변두리를 넘어서야 한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9면

중국이 지린성 훈춘 취안허와 북한 원정리를 잇기 위해 건설 중인 신 두만강대교 전경. 중국이 부두 사용권을 확보한 나진항으로 통하는 유일한 국경교량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
전 외교부 장관

지안의 광개토대왕비와 5호 고분에 서린 역사의 숨결을 마시고 백두산 너머 광활한 지평을 보니 웅대하고도 아름다운 민족의 과거가 다가왔다.

[평화 오디세이 2015] 릴레이 기고 ③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전 외교부 장관

 발길을 옮겨 두만강 하구의 북·중·러 경계선상에서 북한 땅 너머 동해의 푸른 물결을 마주했다. 그곳엔 나진·선봉, 훈춘, 하산을 연결하고 한국이 참여하는 4국 협력 구상이 떠 있었다. ‘평화 오디세이 2015’ 일행이 막 거쳐 온 선조의 힘찬 발자취를 오늘의 땅에 재현시키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얼어붙은 한반도 정세에서 초현실적인 꿈으로 그칠까 걱정이 됐다.

 압록강 하구에서 두만강의 동쪽 끝자락으로 달리면서 한반도 분단은 동북아 평화와 경제협력의 블랙홀임을 새삼 실감했다. 나는 40여 년 전 동·서독 경계를 넘어 다니던 때를 떠올렸다. 당시 브란트 총리는 독일을 서유럽의 변방이 아니라 전 유럽의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동방정책으로 밀고 나갔다. 그는 독일 통일을 목전에 둔 1989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반도가 해양의 변두리로 남지 말라는 충고를 남겼다.

 백두산에 오르면 누구나 영토를 생각한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국토의 3할이 줄었다. 영토 회복의 욕구가 왜 없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70년부터 국토가 아니라 경제 영역의 확대를 통해 역사의 굴곡을 미래의 희망으로 전환시켰다. 90년 통독 후에는 유럽의 중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만 경계의 동쪽 끝에서 생각해 보았다. 한반도 공동의 경제 영역을 조성하고 그 기운으로 만주와 시베리아를 아우르는 동북아 경제공동체를 만드는 꿈이다. 서울에서 파리까지 기차로 여행하는 희망, 한반도를 해양과 대륙 연결의 중심 고리로 만드는 것, 이 모두가 우리의 여망이다.

 2007년 5월 남북 철도가 시범 연결됐다. 그해 7월 노무현 대통령과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전화로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의 성공과 남·북·러 철도 연결을 위해 협력하자고 다짐했다. 두 사안은 직결돼 있다. 문산·개성공단 화물열차는 2008년 11월까지 운행했다. 지금 그 철로는 녹슬고 있고, 6자회담은 먼지에 쌓여 있다. 언제 녹물을 쓸어내리고 먼지를 털어낼지 기약이 없다.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한때는 “폭정의 전초기지”로 불리던 미얀마·쿠바·이란과 관계 정상화로 외교 업적을 쌓는 동안 북한은 국제정치에서 사각지대로 떨어졌다. 북한의 잘못이 그 중심에 있다. 그럼에도 핵심 이해당사자인 한국이 뭘 했는지도 짚어봐야 한다. 주인 스스로가 객을 자처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얼마 전 한 중국 학자는 북한이 아직 폐장입유(廢長立幼)의 후유증에 있다고 했다. 역사 속의 수많은 왕조가 장자 승계의 틀에서 벗어났을 때 겪었던 혼란을 두고 한 말이다. 북한은 지금 울타리를 고치기보다 몸채 간수하는 데 집중하고 있고, 오바마 행정부도 남은 기간 대북 정책을 고칠 여유가 없다.

 이런 가운데 국내 일각에선 북한 자체가 불안정할지 모른다는 뉴스의 파편에 희망적 촉각을 세운다. 희망과 정책은 구별해야 한다. 만약의 사태는 달리 대응하면 된다. 그들의 울타리가 불안하지 않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개성공단 같은 기존의 사업부터 정상화하면서 한반도의 공동체를 향한 큰 걸음을 뗄 채비를 해야 한다.

 중국에서 강 건너 바라본 북한의 모습은 나무 없는 산, 통행 없는 거리, 연기 없는 굴뚝이었다. 50~60년대 남한의 모습이었다. 그래서 북쪽이 가야 할 길은 남쪽이 그 누구보다 잘 안다. 답은 남북 협력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용인하지 않을 ‘핵·경제 병진’ 정책이 아니다.

 남과 북은 걸핏하면 민족을 내세운다. 개성공단은 민족의 평화와 협력의 상징으로서 그 명맥을 초라하게 유지하고 있다. 남과 북이 서로 원칙과 규정에 집착해 근로자 임금 인상 몇 퍼센트를 두고 티격태격하고 있다. 그래서야 우리 스스로가 한반도의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지금 유라시아 친선 특급열차가 달리고 있다. 1만5000여㎞ 여정의 이 열차가 문산에서 개성으로 가는 26.8㎞의 녹슨 구간을 달리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송민순 북한대학원대학교 총장·전 외교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