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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직 후 내 집 마련까지 39년 “집 사려고 사는 인생 … 안 살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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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전국에 아파트만 800만 채가 있다는데…. 우리 시대 청춘들은 빽빽한 아파트 숲을 바라보며 쓸쓸해집니다. 저 많은 아파트 가운데 왜 내 집은 없을까. 취업난을 뚫고 겨우 취직을 하더라도 내 집 마련의 꿈은 요원하기만 합니다. 해마다 집값은 치솟는데 월급은 찔끔 오르는 데 그치니까요. 청춘 세대들 사이에 ‘주포자(주택 구입을 포기한 자)’가 늘고 있는 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의 20~30대가 서울에 있는 아파트 한 채를 구입하려면 대체 몇 년이 걸릴까요. 청춘리포트팀이 각종 통계치를 입력해 시뮬레이션 해봤습니다.

정강현 청춘리포트팀장 foneo@joongang.co.kr

‘집:추위, 더위,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해 지은 건물’(네이버 국어사전)

 한국 사회에서 집은 단순한 사전적 의미를 넘어선다. 집은 삶의 보금자리이고 가족이 함께 생활하며 추억을 쌓는 공간인 동시에 개인의 경제 수준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인식돼왔다. 그런데 요즘 자기 소유의 집을 갖지 않겠다는 청춘들이 늘고 있다. 학자금 대출 등으로 대학을 졸업하는 순간부터 평균 1000만원이 넘는 빚을 떠안고 사회의 출발선에 선 청춘들. 살인적인 취업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그들에게 내 소유의 집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돼 가고 있는 것이다.

 50대 이상의 부모 세대 때만 해도 집은 인생의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다. 집은 곧 재산이자 그 자체로 훌륭한 재테크 수단이 되기도 했다. 차곡차곡 돈을 모아 평수가 더 큰 아파트로 이사하며 뿌듯해하던 그 시절과 비교하면 내 집 마련에 대한 2030세대의 인식은 크게 달라졌다.

 청춘리포트팀이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 2030세대 세 명을 만났다. 개인 형편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반드시 내 집을 가질 필요는 없다”며 한목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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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상현(33·디자인 회사 근무)씨=“서울에서 내 집을 갖는다는 건 저에겐 너무나 비현실적인 꿈이에요. 월급이 200만원 조금 넘어요. 저는 지방 출신이고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데 일단 매달 나가는 월세만 해도 부담이 큽니다. 교통비와 식비, 데이트 비용 등 기본적으로 지출하는 금액을 빼면 사실상 남는 돈이 거의 없어요.

 직장에서 일한 지 2년 가까이 됐는데 통장을 확인해보면 한숨만 나오죠. 모아둔 돈이 거의 없거든요. 게다가 내년에 있을 여자친구와의 결혼 비용까지 일부 마련해야 하죠. 서울의 평균적인 아파트만 해도 제겐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에요. 4억~5억원을 훨씬 넘는 아파트를 지금 제 월급으로 어떻게 살 수 있을까요. 집을 ‘안’ 산다기보다 집을 ‘못’ 산다고 하는 게 맞는 말 같네요.”

# 이모(31·대기업 근무)씨=“연봉 4000만원 정도에 수당까지 합치면 어느 정도 수입이 있는 편이에요. 늘 절약하며 빠듯하게 돈을 모은다면 언젠가는 작은 아파트 정도는 살 수 있겠죠. 하지만 내 집 마련이란 굴레에 평생을 얽매이긴 싫어요. 전세 등 다른 수단도 많은데 무리해서라도 내 집을 마련해야 할 이유를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오로지 내 집 마련을 위해 삶의 다른 부분들을 포기하면서까지 빠듯하게 허리띠를 졸라매야 한다면 인생이 너무 허무할 것 같고요. 아파트 사는 데 수억원을 쓰기보다 차라리 좋은 차를 타고 해외여행도 자주 다니는 여유로운 삶을 택하고 싶어요. 앞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도 생기고 한다면 생각이 바뀔 수는 있겠지만 현재로선 내 집을 꼭 마련하겠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 최현서(25·대학생)씨=“졸업 후 어떤 일을 하게 될진 모르겠지만 결혼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선배들의 얘기를 들으면 눈앞이 캄캄해요. 택시비도 아까워 늘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웬만하면 걸어서 이동하곤 해요. 한 푼을 아끼고 당장 취업도 막막한 상황에서 내 집 마련은 너무 먼 얘기처럼 느껴져요. 지난 학기 수업 도중 한 교수님께서 ‘서울의 아파트 한 채를 사려고 짧은 인생 수십 년을 허비해선 안 된다’고 하시더군요. 그 말이 너무 와 닿았어요. 꼭 내 소유의 집을 갖진 않더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제 나름대로 인생을 즐기며 살고 싶어요”

 “집을 사지 않겠다”는 세 청춘의 목소리는 사실 요즘 20~30대의 평균적인 생각과 다르지 않다. 실제 청춘리포트팀이 국내 20~30대 성인 남녀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반드시 내 소유의 집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다”는 응답자가 54%로 절반을 넘었다. 반드시 내 집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답한 이유론 ‘집값이 비싼 상황에서 내 집 마련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응답이 29명(53.7%)으로 가장 많았다. ‘내 집 마련보다 다른 곳에 돈을 쓰는 게 더 가치 있다’(27.8%), ‘집을 사는 것보다 전세 등으로 사는 게 부담이 적어서’(18.5%)라는 답변이 뒤를 이었다.

 내 힘으로 집을 마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부모님의 경제적인 지원을 받고 싶다고 답한 비율도 절반을 넘었다. ‘내 집 마련을 위해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엔 55%가 ‘그렇다’고 답했다. 희망하는 부모님의 지원 금액은 1억~2억원 미만이 24명(43.6%)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1억원 미만(27.3%), 2억~3억원(23.6%), 3억원 이상(5.5%) 순이었다.

 통계청의 ‘2015년 1분기 가계지출 동향’을 바탕으로 한 시뮬레이션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대학생 1명의 평균 빚은 올해 기준 1477만원(취업포털 사람인 설문조사)이다. 도시근로자 1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246만원, 평균 가계지출은 180만원이었다. 1인 가구의 경우 남은 돈을 모아 서울의 평균가격 아파트(4억9999만원, 국민은행 2015 주택가격 동향)를 사려면 무려 64년11개월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2인 가구의 경우 39년6개월, 3인 가구 32년6개월, 4인 가구는 37년이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기도 지역 아파트(평균가격 2억6051만원)를 기준으로 하더라도 1인 가구는 34년9개월, 2인 가구 21년5개월, 3인 가구와 4인 가구는 각각 17년7개월, 20년이 걸리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 시뮬레이션 결과는 결혼 준비 비용(평균 1억89만원)을 부모님이 대신 부담한다고 가정했을 때의 수치다.

 연세대 성태윤(경제학) 교수는 “아파트 평균 매매가보다 더 저렴한 집을 구매할 수 있고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 근로자의 평균소득이 늘어나는 등 변수가 있다”면서도 “물가 상승, 부동산 가격 변동 등을 고려하면 사실상 평범한 근로자가 부모 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월급만으로 서울에서 평균가의 아파트를 구매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손국희 기자 9ke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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