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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의 재발견]‘터미네이터’ 시리즈의 선글라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매거진M]

‘터미네이터’ 시리즈(1984~)는 선 굵은 스펙터클 액션을 내세우지만, 소품과 디테일도 꽤 즐길 만하다. 그중 하나가 아널드 슈워제네거의 선글라스. 스타일을 위한 단순한 패션 아이템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야기의 일부로서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 T-800(아널드 슈워제네거)은 언제부터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했을까. 물론 1편 ‘터미네이터’(1984, 제임스 캐머런 감독) 중 한 장면일 거다. 미래에서 알몸으로 온 T-800이 완력을 이용해 사람들의 옷을 빼앗아 입는 초반부? 아니다. ‘터미네이터’에서 T-800은 상영 시간의 절반이 지나도 선글라스를 쓰지 않는다. 영화 중반, 심야의 도로에서 카일 리스(마이클 빈)와 벌이는 카 액션 총격전에서 T-800은 큰 상처를 입는다. 한쪽 눈은 피부 아래의 기계 뼈대가 드러날 정도다. 이때 T-800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선글라스를 착용한다(사진 2). 그리고 사라 코너(린다 해밀턴)가 있는 경찰서로 쳐들어간다.
T-800이 선글라스를 쓴 것은 ‘기계’라는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한 것이다. 이처럼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선글라스는 ‘기계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선글라스를 쓰는 행위는 인간성에서 점점 멀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터미네이터’에서 T-800은 선글라스를 쓴 뒤 폭력성과 살상력이 극단으로 치닫고, 경찰서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다. 이후 T-800은 더 큰 데미지를 입게 되고, 인간과 비슷한 존재에서 점점 멀어져 나중엔 금속 골격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반대로 선글라스를 벗는다는 건 기계성을 서서히 상실하기 시작한다는 걸 의미한다. T-800은 ‘터미네이터2’(1991, 제임스 캐머런 감독)에서 초반부터 선글라스를 쓰고 등장한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촬영상 후보에 오른 애덤 그린버그 촬영감독은 차가운 조명과 로우 앵글을 통해 T-800을 인간과 기계 사이의 존재가 아니라, 철저한 테크놀로지의 산물로 표현한다(사진 1). 눈이 ‘영혼의 창’이라면 선글라스 뒤에 철저하게 눈을 감춘 T-800의 모습은 영혼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 완벽하게 비인간적인 존재처럼 보인다. 하지만 T-1000(로버트 패트릭)과의 격투 끝에 T-800의 선글라스는 산산조각 난다. 그 다음 신에서 T-800은 사라에게 “살고 싶다면 따라 오시오”라며 손을 내민다(사진 3).

이후 T-800은 조금씩 인간성을 배워간다. 그는 존 코너(에드워드 펄롱)의 조언을 따라 미소를 배우려 하고(사진 4), 존과 사라를 위해 희생하며, 결국은 용광로 속으로 사라지는 길을 선택한다. 흥미로운 건T-800이 선글라스를 벗을 무렵, 사라는 선글라스를 쓰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터미네이터 같은 인간 병기가 되어간다(사진 5). 한편 T-1000의 광폭함이 극에 달하는 것도 역시 선글라스를 쓴 이후다. 미러 렌즈 계열인데, 액체 금속 킬러인 T-1000의 정체성을 반영하듯 훨씬 더 차가운 느낌이다(사진 6).

재미있는 건 ‘터미네이터3’(2003, 조너선 모스토우 감독)다. 여기서 T-800에게 선글라스는 가죽 재킷과 부츠와 모터사이클 같은 ‘터미네이터 패션’의 일부다. T-800은 어느 남성 스트립 클럽에서 마련한 별 모양의 선글라스(사진 7)가 마음에 들지 않자 밟아 부수어 버리고, 훔친 차에 있던 전통적인 ‘터미네이터 스타일’의 선글라스를 쓴다. 그렇다면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12년 만에 돌아온 ‘터미네이터 제니시스’(7월 2일 개봉, 앨런 테일러 감독)에선 어떤 모습일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그는 거의 선글라스를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가장 인간적인 터미네이터, 아니 친절하고 사려 깊은 가이드에 가까운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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