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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사절기 화훼도’의 인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35호 31면

확실히 우리는 정보화 사회에 살고 있다. 어떤 소식들은 페이스북과 웨이보를 타고 삽시간에 퍼져나가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키니 말이다. 지난달 홍콩에 갔을 때 모든 신문들이 일제히 상당히 큰 지면을 할애해 보도한 뉴스를 봤다.

한 남자 가수가 식당에 갔는데 옆 테이블에 있던 사람의 손이 너무 더러워 도저히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는 내용을 사진과 비디오를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네티즌들은 그의 인신공격적이고 신중치 못한 처사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나 역시 깜짝 놀랐다. 나처럼 두문불출하고 서화 그리기에 빠져 있는 사람은 먹물이 튀어 검은 갑옷을 두른다 한들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만약 연회나 파티에라도 가면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 두렵다. 늘 다른 사람들을 향해 ‘이건 먹물일 뿐이에요’라고 해명할 순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요 몇 년 새 나는 서화에 아주 깊게 빠져 들었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다. 손에 피가 흐를 때까지 그림을 그린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 내가 바로 그 희생양이다.

한 번은 딸 아이가 일본에서 한정판 쌀 전병을 사다준 적이 있다. 포장지에는 24절기의 화훼가 인쇄돼 있었다. 청나라 시대 명 화가인 운수평(惲壽平·1633~1690)의 몰골법(沒骨法 )을 흉내낸 듯한 화풍이었다. 그는 윤곽선 없이 바로 채색과 수묵으로 그려내는 몰골법으로 남종 화조화의 전통을 만든 인물이다. 포장을 뜯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결국 쌀 전병은 유효기간이 지나 기념으로 남길 수밖에 없게 됐다.

나는 예전 베이징에서 몰골법을 배운 기억을 더듬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틀간 12시간을 들여 한 폭의 ‘이십사절기화훼도’를 완성했다. 손에 빨간 물감이 묻어 씻어야겠다 싶어 화장실로 향했다. 씻어도 계속 베어나오는 걸 보곤 그제야 그게 피라는 걸 알았다. 종이에 베어 상처가 생긴 것이다. 숨죽여 조심조심 그리다 거의 맥박이 멎을 정도로 그림에 몰입했는데 어떻게 이런 조그만 통증을 느낄 수 있었겠는가.

앞서 말했듯 나는 지난 4월 제주도에서 자선 전시회를 열었었다. ‘이십사절기 화훼도(사진)’는 당시 내놓은 작품 15점 중 하나였다. 한국중화총상회 회장을 지낸 원국동(袁國棟) 선생은 2005년 서울에서 열린 제 8회 세계화상대회(世界華商大會)에서 만난 인연으로 전시를 찾았다. 그는 작품을 보고 싶다며 하루 일찍 내려왔다. 전시장을 둘러본 그는 특히 이 그림을 좋아했다. 그의 호텔에 걸어두면 여러 사람이 기쁘게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원 회장이 호텔 이름을 말하는 순간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호텔 이름이 평균(Average)이라니. 왜 그런 이름을 지었을까. 평균적인 가격으로 관광객들에게 어필하기 위함인가. 그는 내 오해를 듣곤 박장대소하며 ‘에버 리치(Ever Rich)’라고 정정했다. 그는 “우리 화교들은 돈과 관련된 이름을 좋아하지 않냐”며 자조 섞인 유머를 선보이기도 했다.

그는 7월에 오면 라벤더가 만개한 정원 풍경을 감상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7월이라니! 나는 매년 7월 16일 나의 첫 드라마였던 ‘추하 내 사랑’을 기념하고 있다. 올해로 39년째다.

2006년엔 수백 명의 팬들과 함께 30주년을 축하하기도 했다. 나는 당시 했던 진주 목걸이를 뜯어 한 알씩 기념으로 나눠줬다. 그는 2016년 40주년 기념행사 때 방문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내년 7월 라벤다 필 때가 바로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이다. 한국 친구들이여, 나를 기다려줄 수 있겠는가.

천추샤(陳秋霞·진추하) 라이언팍슨 파운데이션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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