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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치산-후쿠야마 대담 전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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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4월 21일부터 24일까지 유명 정치사상가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저명한 비교경제학자인 아오키 마사히코는 중국 베이징에서 거행된 해외전문가국(外專局·외전국)의 개혁 건의 좌담회 초청에 응해 참석했다. 칭화대 산업발전과 환경거버넌스 연구센터(CIDEG), 비교잡지사 등을 방문해 ‘의법치국’개혁에 대해 중국학자들과 교류했다. 4월 23일 오후 왕치산(王岐山) 중앙기율검사위원회 서기가 중난하이(中南海)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 아오키 마사히코와 도쿠치 타츠히토 중신증권 전 최고경영자(CEO)와 회견했다. 회견에는 외전국 장젠궈(張建國) 국장 및 20여 명의 중앙기율위 및 외전국 관리가 참가했다.

우리측 3인이 방에 입장하자 왕치산이 큰 병풍을 등지고 서 우리를 맞이했다. 장젠궈 국장의 소개를 받으며 우리와 하나하나 악수했다. 거대한 붉은 카페트 위에 쇼파가 반원형으로 놓여있었다. 전형적인 중국 영도자가 외빈과 회견하는 배치였다. 우리는 좌측에 앉았다. 왕치산 오른쪽으로 5~6명이 앉았다. 그 가운데 장젠궈만 안면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 뒤로 2줄 좌석이 모두 찼다. 중앙기율위와 외전국 인사로 여겨졌다. 중간 키의 여성 영어 통역이 왕치산 뒤에 앉았다. 왕치산은 짙은 색의 자켓과 흰 셔츠를 입었고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검은 구두를 신어 붉은 카페트와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 다음은 도쿠치 타츠히토 중신증권 전 CEO가 기록한 회담 전문이다.

왕치산: 후쿠야마 선생, 아오키 선생, 도쿠치 선생 환영한다. 여러분들이 베이징에서 교류를 진행 중이라고 들었다. 매우 좋다. 오늘 우리에게도 가르침을 부탁한다.

후쿠야마: 바쁘신 중에 만나줘 감사하다. 나와 아오키 교수는 스탠퍼드대에서 왔다. 그는 경제학 나는 정치학을 전공한다. 말씀대로 요 며칠 우리는 중국 학자들과 많은 교류를 나눴다. 오늘은 현재 중국이 진행 중인 반(反)부패운동에 대해 당신과 의견을 교환하고 싶다.

아오키: 이번 교류는 주로 중국의 뉴노멀(新常態) 하에서 어떻게 안정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느냐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경제학적인 각도에서 뉴노멀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다음 개혁은 어디서부터 착수하나? 내가 알기로 관건은 기업의 거버넌스 구조 개혁이다. 중국 국유기업을 진정한 의미에서 현대 기업으로 바꾸는 것이다.

왕치산: 좋다. 정치학과 경제학은 매우 좋은 조합이다. 특히 후쿠야마 선생은 중국사·정치사·세계사 모두 연구했다. 민주,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각도에서의 연구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처음 만난 상대를 이해하려면 우선 상대의 이력을 알아야 하는 것과 같다. 이력이 곧 역사다.

나는 중국 역사를 전공했다. 1970년대 동서를 연구했다. 이후 서방문명을 연구했다. 유럽의 역사를 좋아한다. 최근에는 인류역사를 보고 있다. 역사연구는 끝이 없다. 지난해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의 역사 저서를 읽었다. 이후 그의 경향과 지위를 알게 됐다. 일본 전통사학에 회의를 품었다고 해 일본 사학계에서는 ‘멸시파'로 불리는 인물이다. 그는 3대 장문인이다. 몽고사, 유럽과 중국 중간 지역의 미시연구에 뛰어나다. 민족 언어에 깊은 조예를 보였다. 어원학도 그의 전공이다. 1931년생이다. 92년에 발표한 저서로 유명해졌다.(『世界史の誕生 モンゴルの?展と?統』 (筑摩書房, 1992); 한국어판 오카다 히데히로, 이진복 역, 『세계사의 탄생』, 황금가지, 2002) 그의 첫 거시적인 저서다. 이전 저서는 모두 미시적 연구였다. 나는 연구라면 먼저 미시적인 기초를 쌓아야 거시적인 측면으로 승화될 수 있다고 본다. 많은 미시적 연구 업적이 있어야 진정으로 거시적인 시야를 갖게 된다. 당신의 스승 헌팅턴(『문명의 충돌』저자)도 이렇게 요구하지 않았나.(후쿠야마 고개를 끄덕임)

80년대 내가 연구소에 있을 당시 모두에게 역사 독서를 요구했다. 연구소 성립 당시 십여 명에 불과했다. 어떤 격식도 없었다. 독서리스트를 만들어 한 달 동안 책을 읽었다. 첫번째 책이 명대의 『화인어(華人語)』였다. 두번째 책이 70년대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였다. 한 중국 유학생이 귀국 후 나에게 알렉시스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를 건네줬다. 이후 그에게 중국어로 번역해보라고 권했다. 세계문명사가 법의 지배(rule by law)에서 법치(rule of law)로 이행한다는 주장이다.

생각해보니 2010년 처음 남미 브라질을 갔다. 긴 비행 시간 동안 두터운 책을 읽었다. 『미국헌정역정: 미국에 영향을 끼친 25개 사법 케이스(美國憲政歷程: 影響美國的25個司法大案)』다. (손으로 책 두께를 표시하며) 정말 두텁다.

역사 속 현실과 현대는 이어져있다. 지난해 영국 튜더 왕조를 다룬 책을 힘들게 읽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계승까지 읽었다. 유럽사는 지긋지긋하게 어렵다. 중국은 유럽보다 더 복잡하다. 유럽에 비해 중국 역사와 문화의 연속성은 상대적으로 쉽게 이해된다. 올 춘절(설)에 동문 두 명이 찾아와 역사를 주제로 2시간 반 동안 토론했다. 한 명은 고고학 전공, 다른 한 명은 바티칸 전문가다. 중국역사서를 중국으로 가져온 인물이다. 나는 그가 갖고 있던 바티칸 도서관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출입증을 부러워했다. 중국에서 유실된 책들은 (개인이) 읽어도 모두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하지만 읽지 않으면 그만이다.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오늘도 이해할 수 없다. (후쿠야마에게) 당신은 국가·법치·문책(問責) 세 가지 요소를 중국 역사가 모두 DNA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문화 속의 이들 DNA에 대해 설명해달라.

인류학·유전학·경제학은 의학과 마찬가지로 쉽지 않은 학문이다. 의학은 실험할 수 있다. 경제학은 실증을 해야 한다. 인류학은 증명이 더욱 어렵다. 많은 경제학이 의학에서 용어를 빌려왔다. 인체구조를 가지고 경제학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적지 않은 어휘가 의학에서 가져왔다. 정치학 역시 마찬가지다. 의학을 전공한 뒤 저명한 정치가가 된 적지 않은 사례가 이를 증명한다. 정치는 서방에서 어떻게 해석하나? 중국에서는 “대중의 일을 관리”한다고 해석한다. 명예를 둘러보고 의를 생각하는 것이다. 우선 용어를 잘 이해해야 한다.

후쿠야마: Politic(정치)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나왔다. Poli는 도시라는 뜻이다. 당시 도시를 다스리는 것이 곧 정치였다. Public(공공·公共)은 대중이 변화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Republic 역시 여기서 나왔다.

왕치산: 동서 문화의 차이는 표면 형식에서는 무척 크다. 하지만 핵심적인 본질 문제로 들어가면 사실 일치한다. 80년대 식사를 할 때 미국인의 더치페이를 중국인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실 본질에서 공짜로 먹는 밥은 없다. 중국인은 “온 것이 있는데 보내는 것이 없으면 예의가 아니다(來而不往非禮也, 『예기(禮記)』)”라고 말한다. 서구에서는 식사를 다 하면 돈을 식탁에 올려놓는다. 본질에서 (중국과 미국의) 구별은 없다. 하지만 형식을 극복하기는 무척 어렵다.

동서 로마에서 종교는 무척 중요했다. 중국은 신을 믿지 않고 종교도 없는 듯 보인다. 사실은 다르다. 나는 ‘종교’라는 번역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교종’이라 번역해야 맞다. ‘종(宗)’을 뒤에 놓아야 한다. 아주 옛날 우리는 귀신을 믿었다. 이것이 중국과 서방의 차이다. 중국 역사는 길다. 인구도 많다. 중국은 무척 복잡하다.

미국 친구들은 미국의 역사가 200여 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에 전해져 온 것은 모두 유럽 지중해 문화다. 오카다 히데히로는 문명이 있다고 역사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역사와 문명은 지중해의 그리스와 로마, 중국만 함께 가졌다. 오카다는 중국 역사는 사마천(司馬遷)부터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공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본다. 『사기(史記)』 역시 공자를 기재했다.

중국이 현대화를 실현하는 과정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는 우선 자신의 역사와 문명을 명확히 알아야 한다. 우수한 DNA를 현대화 실천 속에서 발휘해야 한다. 우수한 DNA를 중국은 문화 속에 갖고 있다. 중국은 다민족의 유전 과정에서 변이를 겪었다. 중화민족은 더욱 서방문화의 장점을 흡수해야 한다. 세계상 각 민족의 장점을 모두 흡수해야 한다.

현대 많은 문제는 막 생겨난 것들이다. 2013년 우리는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5000년 역사의 나라가 새로 출발하기는 어렵다.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거버넌스(治理) 능력, 전면개혁과 의법치국을 이해해야 한다. 집정당이 제시한 새로운 출발에서 13억이란 숫자를 잊어선 안된다. 이것이 중국적 특색이다. 이는 위대한 역사적 탐색과 첫출발의 과정이다. 당신이 말하는 사정에 대해 우리는 그 척도(尺度·잣대)를 알고 있다. 선진국 인구를 모두 합하면 11억명이다. 중국은 13억에서 14억 인구를 갖고 있다.

나는 미국 친구와 여러 차례 이 문제를 이야기했다. 중국의 변화는 크다. 경제 측면에서 13억 인구가 빈곤을 벗어났다. 대단한 일이다. 하지만 문화와 교육은 아직 멀었다. 이는 정치와 경제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바로 이 방에서 나는 헨리 키신저에게 말했다. “중국이 한 방향으로 나아갈 때 13억 명에게 깎아지른 절벽으로 가라고 할 수 없다. 목표의 실현에는 모든 부분이 다 중요하다. 중국호의 운행은 무척 신중해야 한다.”
시진핑(習近平) 총서기 역시 역사 공부를 중시한다. 그는 분명하고 완전하게 덩샤오핑(鄧小平)의 “중국은 여러 세대가 필요하다. 10여 세대가 지나서야 비로소 현대화를 실현할 수 있다”는 말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

선진국의 선도적인 학자와 중국은 현대화 길에 성공적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종종 중국에 와서 우리와 교류한다. 그들을 통해 우리 역시 많은 소식을 전달한다. 방향과 목표, 시간, 척도와 존재하는 많은 문제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다. 중국을 이해하는 사람은 중국이 가야 할 무척 긴 경로가 앞에 놓여있다는 신호를 전하고 있다. 이 길을 잘 닦아야 한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지도하는 당이 시장화 경제로 나아가기 위해, 13억 인구의 국가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대단한 탐색이 필요하다.

나는 미국 친구에게 미국의 헌법을 만든 사람이 무척 총명하다고 말했다. 우선 자신의 이익을 잘 확정했다. 원죄를 가진 사람들을 석방했다. 이후 빈민을 끌어들였다. 다시 천천히 부녀자를 인정했다. 최후로 흑인을 받아들였다. 건국 200년 후에야 흑인에게 선거권을 줬다. 현재 다른 나라에게는 거꾸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혼란은 관심이 없다. 이집트가 엉망이 됐다. 무슬림형제단 당수인 전 대통령은 20년 형을 받았다. 미국의 특징을 어떻게 복제할 수 있나?

공유제를 기초로 한 국가, 사회주의를 내세운 정당의 부패, 당이 영도하는 시장경제, 국유기업이 주력군이다. 하지만 시장은 개방했다. 이것이 기본 원칙이다. 정권을 잡은 지도층에 부패가 생겼다. 이 노선의 개혁이 바로 법제(法制)다. 어떻게 해야 하나. 장기 집권한 당의 자아감독, 자체정화 압력이 무척 강하다. 우리의 이러한 인식은 막 시작됐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은 실천에서 얻은 것이다. 실천에서 나와야 한다. 어렵다. 자기가 자기를 감독하는 것이다. 우리 역시 이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 의학에서 자기가 자신를 수술한 유일한 사례가 있다. 인터넷에서 찾았다. 러시아 시베리아의 한 외과의사가 스스로 맹장수술을 했다. 이것이 유일한 사례다. 자아 쇄신, 자체 정화는 무척 어렵다.

종교 내부의 거버넌스는 무엇에 의지했나? 가톨릭, 이슬람 모두 좋다. 러시아정교, 개신교도 좋다. 무엇에 기대 다스렸나? 가톨릭에도 문제가 많이 있다. 로마 역시 문제가 많다. 후쿠야마 선생이 연구하지 않았나?

후쿠야마: 연구했다. 관건은 ‘rule of law (법치, 즉 법의 통치)’다. 내 저서 『정치의 기원』에서 법률 정신의 근원을 종교를 통해 분석했다. 각 교파 사이의 충돌은 반드시 ‘상호 감독’ 작용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신이 유일한 진리 감별의 표준이다. 통치 지배의 역량이기도 하다. 법률(신)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내부의 통치자를 포괄해 종교정신이라는 법률통치(rule of law)가 여기서 근원했다. 정부로부터 사법독립이 나온 맥락이다. 중국의 헌법이 ‘rule of law’ 단계에 이르렀는지와 사법독립 여부를 모르겠다.

왕치산: 불가능하다. 사법은 반드시 당의 영도 아래 진행돼야 한다. 이것이 중국 특색이다. 헌법 역시 당, 즉 사람이 만든 것 아닌가? 대통령, 국회, 또 헌법이 있다. 헌법에는 신성성이 있지만 신은 아니다. 대중의 법이다. 중국 황제는 신이었다. 천자(天子)라 불렀다. 일본에도 천황이 있고, 영국에도 여왕이 있다. 군주입헌이다. 미국과 달랐다. 프랑스는 혁명을 영국은 부르주아 개혁을 했다. 하나는 혁명, 하나의 개혁이었다. 도대체 누가 총명한가? 역사에는 같은 시기에도 다른 결론이 나왔다. 프랑스 사람이 말했다. 혁명이 문제를 철저히 해결한다고. 영국인은 우리의 개혁이 비용이 적게 든다고 말한다. 서로 모델이 달랐다. 중국에서도 황제 제도가 소멸한 뒤에 ‘군주입헌’ ‘공화’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주장이 있었다.

우리는 공자와 맹자의 노선을 연구해야 한다. 노자의 도덕경은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5000자에 불과하지만 중국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아직도 연구가 부족하다. 해외에서도 연구가 있다. 오늘 여러분과 친교를 맺었다. 체계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이 역시 (중국이 발산하는) 신호로 간주해야 한다.

(도쿠치 타츠히토를 향해) 저들이 완전히 이해한 것 같지 않다. 당신은 이해했나? 당신이 저들에게 다시 풀어 설명해주기 바란다.

도쿠치: 문제없다. 내가 다 기록했다. 내가 들은 건 이해했다.

우리는 천천히 일어섰다. 한 명 한 명 악수하고 인사했다. 하지만 쌍방은 할 말을 다 하지 못한 듯했다. 3명이 왕치산을 둘러쌌다. 통역이 서둘러 쇼파 뒤에서 앞으로 나왔다.

후쿠야마가 중국어판 『정치의 기원』을 선물했다. 왕치산이 웃으며 받았다.

왕치산: 어릴 적 부모님이 우리에게 열심히 독서하라고 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책만 읽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반드시 ‘마음’을 써서(가슴을 가리키며) 책을 읽어야 한다. 공자는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고 말했다. (통역을 보고 웃으며) 당신이 어렵겠군.

하지만 실천은 더 중요하다. 때문에 나는 왕양명(王陽明)에 관심이 많다. 그는 심학(心學)을 말했다. 최근 몇 해 동안 짬을 내서 줄곧 책을 읽었다. 쉽지 않았다.

내 머리 속에는 왕양명이 떠다닌다. “치양지(致良知, 맹자의 양지(良知)와 대학의 치지(致知)를 합한 것으로 누구나 지선(至善)에 이를 수 있다는 학설)”와 “지행합일(知行合一)” 두 구절이다. 왕양명의 심학과 일본의 무사도(武士道) 정신이 융합해 메이지 유신의 정신세계를 만들었다.

도쿠치: 왕양명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무척 크다.(왕치산이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임)

아오키: (책 한 권을 꺼내며) 내가 우징롄(吳敬璉) 선생과 함께 펴낸 중국경제의 뉴노멀에 대한 최근 저서다. 참고하기 바란다.

도쿠치: 아오키 선생과 몇몇 중국학자가 이번 국유기업 개혁 과정에서 일정 비율의 주식을 사회보장 등 여러 공적 기금에 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한다면 진정 정치와 기업의 분리를 해결할 수 있나. 전문경영인의 적극성 발휘 문제와 함께 국민이 자본의 이득을 함께 나누는 문제도 해결할 수 있나. 어떻게 보나?

왕치산: 우징롄 선생과 그들이 연구했다면 맞다. 제시할 수 있다.

도쿠치: (주제를 바꿔) “‘중학위체 서학위용’(中學爲體 西學爲用, 중국학문을 근본으로 하고, 서양학문은 이용한다)” 주장을 아직도 적용 가능한가?”

왕치산: 안된다.

도쿠치: 중국 문화에 같은 DNA가 있어서인가?

왕치산: 맞다. 인류문화의 기본 요소는 중국에 모두 있다. 그 가운데 좋은 것을 어떻게 발휘하느냐가 문제다.

도쿠치: 공동 가치라고 말할 수 있나?

왕치산: 당연하다. 기본적인 가치는 같다. 아니라면 우리가 어떻게 말하겠나?

후기

우리는 헤어졌다. 로비를 나와 차에 탔다. 후쿠야마와 아오키는 뒷좌석에 앉고 나는 앞에 앉았다. 승용차가 천천히 중난하이를 떠났다.

차 안에서 아무도 말이 없었다. 차가 빠르게 징산(景山)공원에 도착했다. 후쿠야마가 징산을 가리키며 갑작스레 나에게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나는 “징산공원이다. 정상에서 고궁(자금성) 전경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후쿠야마는 “와본 적이 있다. 명나라 최후 황제 숭정(崇禎)제가 스스로 목을 맨 곳이다”고 말했다. 잠시 말을 멈췄다가 “현학 토론 같았다”고 말했다. 그가 방금 전의 회담을 말한 것이라고 나와 아오키 교수는 알 수 있었다.

후쿠야마는 신중하게 사유하는 학자다. 그가 ‘신보수주의 학파’의 일원이라고 말했지만 유가기질의 사상가다. 이번 회담에서 후쿠야마는 토론에서 관심 있는 구체적 내용을 토론했다고 생각하지 않은 듯 했다. 부족한 느낌이었다. 왕치산의 우의적인 대화를 전부 소화하지 못해 곤혹스런 느낌이었다.

아오키는 달랐다. 비교 국제경제학 각도에서 관심과 중국 연구를 수십 년간 해온 학자다. 오늘 중국이 세계 대국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시점에 중국의 관건적인 인물과 충분히 접촉해서다. 직접 목소리와 생각을 들었다. 흥분에 가득찬 듯했다.

“우리는 오늘 대화 내용을 소화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몇 해 심지어 수십 년 후 오늘 회담을 돌이켜 보면 역사적 회담임이 분명합니다.” 내가 말했다. 두 학자는 말이 없었다. 고개만 끄덕였다.

회견에 관심이 있는 친구가 문자로 물었다. 나는 “회담은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90% 이상이 알아듣기 어려운 회담이었다”고 회답했다. 왕치산을 아는 한 친구가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왕치산이 자네는 무엇이든 사고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는 말은 같지 않다.”

2015년4월28일 도쿠치 타츠히토(62) 중신증권 최고경영자(CEO)

(※대담 기록은 5월 중순 중국 공식망(共識網)을 통해 공개됐으나 잠시 후 삭제됐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5월 왕치산과 후쿠야마 회담을 보도했고 중국 뉴스사이트 펑파이(澎湃)는 대담서 언급된 오카다 히데히로(岡田英弘)에 대한 기사를 게재해 본 대담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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