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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파산부 판사가 본 망하는 기업의 특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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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

10년 전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 근무한 적이 있다. 아직 외환위기의 여파가 남아 있어 굵직한 대기업도 여럿 법정관리 상태였다. 회생에 성공하거나 결국 파산하고 마는 기업들의 생사를 가른 여러 요인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경영자의 자세였다.

 한 전자제품 회사의 경우다. 사건이 접수되면 대표자 심문부터 진행한다. 임원들을 거느리고 들어오는 대표이사의 위용이 대단했다. 안경, 손목시계, 만년필까지 금빛으로 번쩍번쩍했다. 그의 첫마디는 대수롭지 않은 일시적 자금 경색으로 법원에 폐를 끼치게 되어 죄송하다는 것이었다. 임금 체불 중인 근로자들, 연쇄 부도 위기에 놓인 영세납품업체들이 아니라 말이다. 질문을 시작했다. 운전자금 조달계획, 매출 추정의 근거, 적지 않은 대표이사 가지급금 내역. 그런데 답변은 대부분 “실무자가 답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임원의 입만 쳐다보는 그를 보며 이 기업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었다. 국밥집조차 주인이 가게에 늘 나와 있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의 맛이 천양지차다. 결국 이 기업은 파산했다.

 한 정보통신(IT) 기업의 경우다. 세계 최초라는 제품들을 자랑하기에 그 매출액을 물었다. 제로였다. 그럼 도대체 장부에 나오는 매출은? 일본 제품을 수입해 관청에 납품하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요란한 신기술 제품들은 정부지원금을 받기 위해 모양만 갖춘 것이었다. 조립비용도 안 되는 연구개발비로 세계 최초 기술을 양산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캐물은 결과다. 대표이사는 퇴직 공무원이었다. 인맥 장사가 전부인 그에게 기업의 미래에 대한 비전은 없었다.

 반대 경우도 있었다. 작은 해상운송업체였다. 대표이사는 내 온갖 질문에 대해 회사의 약점까지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마무리하려는데 잠시만 기회를 달라고 하더니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시작했다. 남북 관계, 대중국·러시아 관계의 현황 및 전망을 시작으로, 항로를 다변화해 미래에는 러시아의 철도와 연결시켜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기까지의 장대한 비전, 이를 위한 실행계획과 구체적 진척 상황이었다. 물론 법원은 쉽게 믿지 않는다. 회계법인을 통한 실사작업을 벌이고 보수적으로 평가했다. 그 사이에 대표이사는 금융기관, 거래업체, 근로자들을 모두 설득해 동의를 얻어냈다. 놀라면서도 내심 납득했다. 결국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다. 현재에 굳건히 두 발을 딛고 서 있으되 눈은 미래를 바라보며 빛나는 기업가를 보면 함께 꿈꾸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문유석 인천지법 부장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