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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보다 강력한 성적 자극제는 없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32호 22면

일러스트 김옥

“여자 나이 마흔이 되면 얼굴과 엉덩이 둘 중 하나는 책임져야 해!”

백영옥의 심야극장 <5> 커피 한 잔이 섹스에 미치는 영향

헬스클럽에서 스피닝 중인 여자의 첫 대사는 이것이다. 애비는 그날, 아들 제이크가 던진 공에 얼굴을 정통으로 맞았다. 이마가 찢어지고 피가 많이 흘렀는데도, 아들만 걱정하는 파트너 케이트의 냉담함에 잠재된 분노와 공허함이 함께 폭발했다.

“갓 태어난 제이크를 전자레인지에 넣는 꿈을 꿨다. 아기랑 친해지기가 어려웠다. 요람에 눕혀놓고는 아기가 전자레인지에 있는 꿈을 계속 꿨다. 아기란 너무 작아서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가끔은 아기랑 나랑 결혼하는 꿈을 꿨다. 죽으라는 건지 먹으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육아잡지에 실릴 글을 친구들에게 받던 애비의 친구는 그녀에게 이렇게 묻는다. “술 먹고 쓴 거야?”

영화 ‘커피 한 잔이 섹스에 미치는 영향’은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다. 애비의 파트너인 케이트는 잘나가는 이혼전문 변호사로 두 아이의 엄마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애비는 맨해튼의 오래된 아파트를 아름답게 고쳐 되파는 일을 하지만, 집에서 주로 살림을 한다. 두 여자는 함께 아이들을 키우고, 짐작컨대 꽤 오래된 커플이다. 케이트는 늘 바쁘고 피곤하며, 애비의 욕구에는 점점 관심이 없어진다. 알다시피 흔한 중년 부부의 일상이다. 적어도 곯아떨어진 파트너를 보며 침대 천장의 무늬를 헤아리던 애비가 일탈을 시도하기 전까지.

“가정주부치고 당신, 너무 섹시한데요. 참, 나까지 오르가즘 느끼게 할 필요는 없어요.”

몸으로 소통하는 희귀한 재능을 발견
애비는 심한 욕구 불만 때문에 여자를 돈으로 사는 모험을 벌이는데, 매춘부에게 의외의 말을 듣게 된다. 기괴한 자아성찰이긴 해도, 자신에게 여자와 몸으로 소통하는 희귀한 재능이 있다는 걸 ‘발견’한 것이다. 애비는 맨해튼의 아파트 리노베이션을 함께하던 수리공을 통해 섹스 파트너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선별한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그녀들과 대화하는 것이다. 애비의 비밀스러운 사업은 그렇게 시작된다.

“몸의 특정 부위를 그리는 실습 과제가 있었어요. 전 제 성기를 그렸어요. 구멍을 하나 그리고 그 주위에 별을 그렸죠. 그 다음엔 과녁을 그리고, 별 위에는 비눗방울을 그렸어요. 꼭 자기장 같은 느낌이었죠. 전 23살인데 아직 연애 경험이 없거든요. 누구와 자 본 적도, 키스해본 적도 없어요. 가끔은 걱정돼요.”

애비의 첫 번째 고객은 뉴욕대에서 여성학을 공부하는 뚱뚱한 여자였다. 그녀는 친밀해진 첫 번째 고객에게 세 권의 책을 선물한다. 『새로운 미국을 위한 식이요법』(엄마가 준 그 이상한 디톡스 다이어트 책은 버려!), 『제 2의 성』(우리에겐 바이블이지!), 『간디 평전』(다이어트 욕구를 증진시켜!)…. 고객은 애비에게 선물 받은 책이 좋았다고 말한다. 물론 간디 평전을 읽고 살이 빠지진 않았지만.

나른한 얼굴의 가정주부와 과격함을 좋아하는 여자, 인종과 외모, 나이를 초월한 그녀의 고객 중에는 완벽한 가정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여자도 있다. 그들 중에는 “남편은 너무 예의 바른 사람이라서 하나부터 열까지 내 의견을 물었죠…. 심지어 자기랑 섹스를 할지 말지도 물었어요”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여자도 있고, 커피숍에 앉아 “난 여성봉사단체 회원이에요. 우리 반 학부모 대표고, 매주 화요일마다 급식 봉사도 한다구요!”라고 말하는 애비의 이웃 샘도 있다(이들은 아이들 때문에 학교에서 이미 여러 번 마주쳤다).

“이 일 정말 원해서 하는 거예요?”
“날 오해하나 보네요.”
“그냥 보면 알아요. 남편이 있나요?”
“아뇨.”
“애들은?”
“없어요.”
“머리에 흉터가 있던데 애들이 어린가 봐요. 현실을 도피한 거죠?”

고객 중에는 그녀의 머릿속을 스캔한 듯 꿰뚫어보는 여자도 있는데, 애비는 그녀에게 아이가 없다고 거짓말한다. 거짓말조차 필요 없는 케이트의 무관심에 지쳐가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말이다.

귀 기울여 듣는 능력이 필요한 결혼 생활
이 영화에서 침대는 섹스보다 대화를 위해 더 많이 활용된다. 애비의 침대는 ‘밤’의 공간이 아니라 ‘대낮’의 무대다. 강한 햇살로 살균된 듯한 그 쾌적한 침대 안에서 여자들은 ‘눈’으로 섹스하고 ‘입’으로 사정하듯 발화한다.

이때 ‘섹스는 대화다’라는 말은 그저 은유가 아니다. 만약 여자를 유혹하고 싶은 남자가 있다면 이것에 주목해야 한다. 여자가 남자에게 “날 사랑해?”라고 반복해서 묻는 건, “널 사랑해!”라는 말을 확인하고 귀로 ‘듣기’ 위해서라는 것. 그것이 강력한 성적 흥분과 함께 오르가즘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한 모든 대화는 가장 강력한 최음제다.

연구 결과에 의하면 동성애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이성애 사랑도 경험한다. 다시 말해, 양성애 성향이 배타적인 동성애 성향보다 훨씬 더 일반적이라는 뜻이다. 특히 감정의 격정기인 사춘기 때, 매력적인 동성 친구에게 애틋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경험은 예상 외로 많다. 사람들은 대부분 성별에 관계없이 정신적 사랑, 즉 성적 끌림이 없는 낭만적 사랑에 빠질 수 있다. 세상은 성적 지향에 관한 한,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구글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치면 1초에 89억 3천만 개의 결과가 검색된다. 이 숫자는 ‘섹스’라는 단어의 두 배다. 사랑의 종류를 섬세하게 나누는 것을 떠나, 사랑만큼 복잡한 건 없다. 저 남자 괜찮다 싶으면 ‘게이 아니면 유부남’이라는 말은 더 이상 뉴요커들만의 농담이 아니다. 애비와 케이트가 레즈비언 커플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이 영화는 어느 모로 봐도 중년 부부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사랑의 결과로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기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정신적 경제적 비용은 상상 이상으로 늘어난다.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 사랑을 지속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 말이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상대방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법을 깨닫는 일일까.

나는 그것을 ‘귀 기울여 듣는 능력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말할 것이냐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어떻게 들을 것인가의 문제. 이때 ‘커피’는 어느 순간 상실된 그 능력을 되찾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커피나 한 잔 더 마셔야겠다. 벌써 몇 번째 잔인지 모르겠지만. ●

백영옥 광고쟁이, 서점직원, 기자를 거쳐 지금은 작가. 소설『스타일』『다이어트의 여왕』『아주 보통의 연애』 , 인터뷰집 『다른 남자』 , 산문집『마놀로 블라닉 신고 산책하기』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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