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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87)- 30년대의 문화계(120)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그다음의 질의는 그때 사람들은 왜 아호란 것을 좋아해서 이름을 둘씩 셋씩 가지고 있었느냐는 것이다. 염상악이면 염상악이지 횡보라는 아호를 지어 어떤때는 염상섭이라 부르고 또 어떤때는 횡보라고 부르느냐는 것이다.
빙허 현광건, 도향 나빈, 수주 변영로하고 꼭꼭 아호가 붙어다니는데 젊은사람으로서는 헛갈려 빙허와 현광건이 같은 사람인지 어쩐지 아리송하고, 그렇지 않아도 이름을 기억하기가 힘드는데 아호까지 기억해야하니 더, 힘들다는 것이다. 이것은 주로 젊은층에서 나오는 불평이고, 더 근본적인것은 아호라는 것을 아주 없애버리고 본명만 쓰자는 것이다.
생각하면 이 바쁜 시대에 이름하나만 가졌으면 되었지 번거롭게 둘씩 셋씩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자연히 아호가 없어지고 본명만 남을 것이지만, 30년대로 말하면 그렇지 않았다. 그때는 봉건잔재라고 욕하고 모든것에 혁신을 좋아하는 프롤레타리아문학패들까지도 회월이니 민촌이니 운야니 하는 아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그때 왜 아호를 좋아하고 아호로 행세하기를 좋아하였는가.
옛날에는 사랑방이 점잖은 문화인들의 사교장이었다. 조금만 살림이 넉넉하면 으례 사랑방이 있어 손님을 거기서 만났다. 내가 어릴때 기억으로 동네에 사는 아무개 아무개 집에는 넓은 사랑방이 있어 점심때률 지낸 오후 두세시쯤 되면 그 당시의 문화인들이 모여들었다. 보료위에 두줄로 주욱 앉아서 담뱃대률 서로 맞대고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때 서로 부르는 호칭이 이름이 아닌 아호였다.
『여보게 춘전!』
『이봐, 이재!』
『우당,이것 보게!』
이렇게 아호로 부르는것이 아무개씨, 아무개군, 아무개하고 알이름을 부르는것 보다 친근감이 있고 우아하고 점잖고 좋았다.
사랑방이 점점 개화되어 30년대에 생긴것이 신문사·학교, 그리고 광문회나 계명구락브·기독청년회 같은 사우구락부등이었다. 조선사람이 경영하는 회사도 없었고, 사업장도 없었고, 은행은 서너개 있었지만 바쁘게 영업하는 곳이니 한담할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조금 급이 떨어져 한약방과 복덕방이 있었는데 여기가 빈궁한 노지식인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이런 곳에서는 서로를 부를 때 아호를 써 불렀지 알이름을 부르는 일은 없었다.
『춘전, 그 사건은 어떻게 진전되었소?』
『이재, 오늘은 기사거리가 너무 없는데…』
이런 식의 대화가 신문사 편집국에서 교환되었다. 질색은 내가 스물다섯에 신문사에 들어갔을 때 댓바람 호가 무엇이냐? 호가 없으면 짓자고 하는데는 놀랐다.
여기 비해 학자들은 낙관이 필요하므로 호를 짓는것은 당연하고, 또 호로 부르는것도 당연했다. 이당, 청전, 심산, 의재가 다 스무살안밖에 지은 아호였고, 본명보다 이 아호로 더 유명하였다.
어쨌든 아호는 사랑방사교로부터 시작되었고, 시인묵명들에게는 필수의 것이었고 언론계에서는 멋으로 불렀다. 이때문에 이 글에서도 사랑방 사교가 그대로 계승되어 내려온 30년대 문화인들 사이에 성행하던 아호를 그대로 쓴것인데, 요새 젊은 사람들에게는 골사납게 들릴는지 모른다.
해방후에 와서는 그전에 쓰던 아호는 그대로 써왔고 새로 짓는 사람은 드물어졌다. 더구나 요새와 모든일이 바빠져 한가롭게 아호를 서로 부르면서 한담할 시간이 없어졌으므로 지금와서 아호는 지난날의 골동품 같은 것이 되었다.
춘원·횡보·상허등의 아호가 사라져 가는것이 시대의 추세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멋이 완전히 없어진다는 것이 조금은 삭막해져간다는 생각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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