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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 senior] 열쇠에서 벗어나는 순간, 당신의 삶은 ‘섹시’해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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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관승 세한대 교수(전 iMBC 대표)

베를린에서 호텔에 투숙하는 것은 한때 이 도시에 살았던 자로서 예의가 아니다. 더더욱 어떤 영감을 원한다면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 호텔방은 피하고 싶었다. 글을 쓰는 이에게 집을 빌려준다는 독일의 예술가 겸 작가와 인터넷을 통해 연락이 닿았다.

초고속 열차인 ICE를 타고 베를린 중앙역에서 내린 뒤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옛날식 아파트의 4층이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대형 여행가방을 옮기느라 셔츠에 땀이 흠뻑 젖었지만 방을 둘러보는 순간 모든 피곤이 달아나 버렸다. 그래 바로 이런 공간이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환하고 조용하며 무엇보다 작업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군더더기가 없고 단순하다. 작가 겸 예술가인 집주인은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 나의 표정을 읽고 호쾌한 웃음을 보인다.

비바람에도 페달 밟는 베를린의 중년들
“머무는 동안 이 집은 완전히 당신 것이에요. 이 공간을 독점하면서 제가 쓰던 주방기구는 물론이고 책과 음악 CD들도 마음껏 보고 들어도 됩니다. 여기서 멋진 글을 써보세요. 나도 지난달에 여기서 소설 한 권 탈고했답니다. 집중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죠. 하하!”

그는 내게 두툼한 구식열쇠 꾸러미를 전달하고 사라졌다. 스마트키와 전자 카드가 일반화된 서울과는 달리 베를린에서는 아직도 많은 것이 옛날식이다.

베를린에는 적은 비용을 받고 집을 빌려주는 곳이 제법 많다. 내 집의 열쇠이지만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손님에게 빌려줄 수 있다는 자세다. 이름하여 ‘공유경제(Sharing Economy)’의 현장이다. 소유가 아니라 점유에 익숙해진 생활 방식이다. 엘리베이터가 없기에 나선형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고 무거운 생수와 먹거리를 실어 나르는 것은 여간 불편하지 않을 테지만, 그들은 그런 불편함을 감수한다. 잃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는 법이다.

돌아보니 나의 서울생활은 편안함에 중독되어 있던 듯싶다. 모든 것이 전화 한 통, 클릭 하나면 해결되었다. 베를린에 체류하는 단 열흘 동안만이라도 나는 가급적 차를 타지 않고 많이 걷기로 했다. 최대한 인터넷도 자제할 생각이다. 대신 몸의 모든 감각기관을 열어 이 도시를 느끼고 있다. 새벽잠을 깨우는 암젤이라는 새의 아름다운 소리, 동네 빵집에서 배어나오는 구수한 브뢰첸 냄새, 냉기와 온기가 적절히 배어 있는 숲 속의 진한 공기, 동네 모퉁이 이탈리아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에스프레소의 향기, 되너 케밥을 만들고 있는 터키 식당 종업원의 경건한 얼굴이 서서히 나의 오감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중년들은 축 늘어져 있지 않아서 반갑다. 비바람이 부는 날에도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앞으로 전진해 나가는 중년들의 뒷모습을 보면 뭔가 뭉클해진다. 건강한 게르만의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고 수퍼시니어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절대로 위축되지 않는 정신이다.

베를린 한국문화원으로부터 ‘한류’ 강연을 요청받고 갔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로 K-POP에 빠진 독일 청소년들만 올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중년의 독일인들도 적지 않게 자리 잡고 있었다. 바쁘고 지친 평일 저녁 시간인데도 그들은 시간을 내어 끝까지 경청하는 눈빛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들에게 익숙지 않은 이문화(異文化)일 텐데도 왜 대장금이 한류 사극의 아이콘이 되었는지, 베를린에 갑자기 50개가 넘는 한국 음식점 붐이 일어났는지, 그 이면을 알고자 했다.

필자가 독일 작가로부터 무료로 잠시 빌린 베를린 숙소와 열쇠(왼쪽 사진). [사진 손관승]

수퍼시니어에게 필요한 독일식 표현법
그들과의 대화에서는 월급이 얼마인지, 아이들의 학업성적이 몇 등인지는 등장하는 법이 없다. 누군가의 말처럼 서울의 중년들 사이에는 ‘평등’이 주된 대화의 소재 아니던가. 평등이란 아파트의 평수와 아이들의 학업 등수를 조합한 말이다. 베를린에서는 얼마짜리 옷을 입었는지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것보다는 어떤 식으로 자기의 개성을 표현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성형과 진한 화장발, 그리고 옷의 브랜드만으로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은 베를린 시장 보베라이트가 했던 말처럼 “가난하지만 섹시”한 삶을 지향하는 곳이다. 한국 기준으로는 절대로 가난하다고 할 수 없지만 독일 다른 지방정부에 비해 산업시설이 적어 지방재정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나온 말이다.

“나는 가난하지만 섹시하다.”

이 얼마나 당당하면서도 또 얼마나 매력적인 표현인가. 여기서 섹시하다는 것은 남과 다른 인생, 매력적인 삶을 말한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본질적인 것보다 자기를 둘러싼 것으로 웅변하려 든다. 내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있는지, 어떤 동네의 아파트에 사는지, 자식이 어느 대학에 입학했는지, 골프채 값은 얼마인지, 유력한 정치인이 동창생이라는 얘기 등으로 자기를 포장하려든다. 한국인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걸 가리켜 영어로 ‘overstatement’라고 표현한다. 실제 이상으로 자기를 부풀려 말하려는 습관이다. 표현의 거품이다. 반면에 독일인들의 일상은 ‘understatement’의 삶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절제하거나 실제보다 낮춰서 표현하는 걸 말한다. 권력과 부유함도 웬만해서는 과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식인들 역시 자기가 아는 이상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이 큰 차이다.

열쇠에 얽매이지 않는 베를린 사람들
열흘 동안 내가 선택한 숙소는 과거 베를린 장벽 주변이다. 분단 시절에는 가난한 예술가와 학생, 그리고 외국인들이 주로 거주했지만, 지금은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새로운 문화 흐름의 핫스팟(Hot Spot)이 되어 있다. 클래식 음악으로 유명한 도시가 이제는 현대 미술의 메카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섹시한 곳이기 때문이다.

며칠 뒤 나는 이 아파트의 열쇠를 반납해야 한다. 어쩌면 인생은 열쇠를 받고 반납하는 과정이 아닌가 한다. 여행자처럼 우리는 모두 세상이라는 이름의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가 어느 날 체크아웃 해야 한다. 직장 생활 역시 그렇다. 중요한 자리에 있을수록 열쇠가 많지만 퇴직할 때 이 모든 것을 반납해야 한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호텔처럼 잠시 점유하다 떠난다고 쿨하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어쩌면 열쇠에서 벗어나는 것이 섹시한 삶의 시작이다. 베를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왜 문제가 없겠는가. 걱정도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열쇠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우리도 시작해보면 어떨까. 섹시한 인생 말이다.

손관승 세한대 교수(전 iMB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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