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중식 대가 이연복의 고집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레몬트리] JTBC 「냉장고를 부탁해」를 통해 처음 이연복 셰프를 알았다면 인상 좋은 중국집 아저씨 정도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올해로 43년째 중식을 만들고 있으며, 그가 운영하는 중식당 ‘목란’은 17년 동안 4번이나 자리를 옮겼음에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어찌 대가(大家)라 칭하지 않을 수 있을까?

중식 대가의 오래된 조리 도구

중식 팬 매일 점심과 저녁 예약이 꽉 찬 요즘은 보름에 한 번꼴로 팬을 갈아줘야 한다. 장시간 센 불에서 가열하다 보니 금세 닳아서 휘어지기 때문. 이연복 셰프의 주방에는 다 쓴 팬과 새 팬이 소복이 쌓여 있다.

중식 칼 이연복 셰프는 칼질할 때 칼날이 찌그러지지 않는 것을 좋은 칼이라 칭했다. 그만큼 쇠가 단단해야 한다는 말인데 대신 칼날을 갈 때는 강한 만큼 힘들다. 오른쪽에 놓인 2개의 칼은 실제로 주방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원래는 같은 제품이었다. 두 번째 칼이 3년 정도 사용한 것인데 닳아서 면적이 좁아졌다. 왼쪽 3개의 칼은 비교적 고가로 주로 강의나 방송을 할 때 사용한다. 칼 전면의 물결 모양은 쇠를 여러 번 접어 두드리면서 생긴 것.

중식 국자 한눈에 봐도 심하게 휘어진 왼쪽 국자가 이연복 셰프가 20년 넘게 사용한 것이다. 반면 오른쪽 국자는 10년 정도 사용했다. 일본 제품으로 단단한 쇠로 만들어진 것인데도 요리할 때 국자 안에 담긴 내용물을 빼기 위해 팬에 두드리다 보니 점차 휘게 된 것.

40년 동안, 변한 것들

이연복 셰프가 처음 식당에 발을 디딘 것은 열세 살 때였다. 지금처럼 요리사가 각광받는 시대가 아니었고 어릴 적 외할아버지가 중식당을 운영했으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올바른 선택이었지만 당시엔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저처럼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가장 만만하게 여겼던 곳이 중식당이었으니까요.” 더군다나 화교 출신인 그가 설 땅은 더욱 좁았다. 이연복 셰프는 그때를 추억이라 말하기엔 힘든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못 버티고 나간 애들도 많았는데 전 직진 말고는 옆길도, 돌아갈 길도 없었어요. 앞으로 쭉 걷다 보니 조금씩 인정도 받고 위치도 올라가고, 점점 사정이 좋아지니까 더 열심히 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의 나이 열일곱에 명동 사보이호텔 중식당에 막내로 입사하게 된다. 나이가 어렸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일한 지 2년이 넘었을 때 둘째 칼판(칼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까지 올랐으나 폭력 사건에 휘말려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친구 도와주느라 한 일이었는데 마치 제가 싸움꾼인 것처럼 소문이 돌아 저를 고용하는 곳이 없었어요.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속이 울컥거릴 정도로 억울해요.”

갓 스무 살이 넘은 청년이 인생 헛살았다 생각했을 정도로 힘든 시기였다. 사람에 의한 상처는 때론 사람으로 치유받기도 하는 법. 평소 따르던 선배의 추천으로 주한 대만대사관 조리장에 지원해 덜컥 합격했다. 그의 나이 스물두 살이었다. 생활이 윤택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사관에서 연회를 자주 여는데 손님은 바뀌지만 호스트가 같아 매번 다른 메뉴를 선보여야 했기 때문.

“요즘 같았으면 인터넷 검색도 하고 이래저래 방법이 많았을 텐데 그땐 책 보는 게 전부였어요. 근데 책방 가봐도 다 뻔한 메뉴들이고, 대만 갈 때마다 몇 권씩 사오긴 했는데 그걸론 역부족이었죠.” 당시엔 엄청난 부담감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심했으나 지나고 보니 그때가 새로운 메뉴에 대한 방대한 데이터를 축적할 수 있었던 중요한 시기였다고.

그리고 대만대사관 조리장 일을 시작하면서 바뀐 가장 큰 변화는 이연복 셰프의 인상이다. “대사관에 들어갈 때만 해도 제 몸무게가 48kg이었어요. 그때 사람들이 제 눈에 살기가 있다고 했어요. 대사님도 그걸 느꼈는지 한번은 자기처럼 아침 점심 저녁 거울 보면서 미소 짓는 연습을 해보라는 거예요. 한 2~3개월은 대사님이 제대로 연습하는지 확인을 할 정도였어요. 한데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양치나 세수하면서 편안한 표정을 짓는 연습을 하게 되었어요.”

이연복 셰프의 트레이드마크인 ‘온화한 미소’가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면 ‘인상이 바뀌면 인생이 바뀔 것’이라는 대만 대사의 예언은 적중한 셈.

이연복 셰프의 중식당 ‘목란’은 중국 문학에 등장하는 ‘화목란’이란 여성의 이름에서 따왔다.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터에 나간 효심이 지극한 여성으로 디즈니에서 화목란의 이야기를 엮어 애니메이션 「뮬란」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연복 셰프가 일본에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죄스럽고 또 한국에서 정신없이 살다 보니 부모님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어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40년 넘게, 변하지 않은 것들

평탄한 생활은 때론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다른 욕심을 불러오기도 한다. 1988년, 그의 나이 서른에 8년간의 대사관 생활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일본은 버블 경제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로 엔화가 급등해 환율의 가치는 한화의 10배였다.

한국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 일본에서 ‘파친코 프로(도박의 일종인 파친코 게임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로 생활하다 술집 주방장을 거쳐 중식당을 오픈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삶을 이어갔다.

그러다 10년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1998년 한국으로 돌아온 이연복 셰프는 ‘목란’이라는 이름의 중식당을 열었다. 그는 그즈음부터 지금까지 아침을 거르고 있다. 또 담배도 안 피우고 과음도 하지 않는다. 모두 예민한 미각을 유지하기 위함으로 배부른 상태에서 간을 보면 정확하지 않고 포만감에 해이해질 수 있기 때문.

목란의 주방에는 총 8명의 직원들이 이연복 셰프의 지휘 아래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여기서 ‘지휘’란 단순 ‘지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두에서 솔선수범한다는 것. 그가 직접 주방을 지키기에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었으리라.

「냉장고를 부탁해」 촬영을 허락한 것도 녹화일이 목란의 휴무일인 월요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번은 방송 녹화를 금요일에 해야 했는데 그때는 아예 식당 문을 닫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과 맛이 달라졌다 평가를 들을 때면 속상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제가 생각했을 때 맛이 달라질 만한 요소는 없어요. 맛은 상대적일 수 있으니 그날 손님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고 또 저도 사람인지라 제 몸 상태에 따라 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수도 있고요.” 이연복 셰프는 음식을 만들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 했다.

교과서적인 대답처럼 들리나 자신이 40년 넘게 한길을 걸어오면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철학이라고. 다시 말해 즐겁게 일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고, 건강한 생각이 몸에 이로운 음식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침에 출근해 그가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직원들에게 농담을 건네는 것이다. 또 후배들이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직원들의 식사는 그가 직접 만든다. 한때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나 억울한 적도 있었고 남보다 일찍 경험한 가장의 무게가 버겁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처음엔 음식을 하는 게 너무 힘들다 생각했는데 어느 시점이 지나니까 자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다 같은 중식 말고 하나를 만들더라도 차별되게 만들자 싶었어요. 그러면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손님들이 찾아올 테니까요.”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후배들이 인정하는 중식 대가의 반열에 올랐고 네 번이나 장소를 옮겼음에도 여전히 찾아주는 단골들이 이를 입증한다. 이연복 셰프는 예순이 넘어서 몸이 허락할 때까진 목란의 주방을 지킬 생각이다.

1 정직한 팔보채. 여덟 가지 진귀한 재료가 들어가서 붙여진 이름 팔보채는 조리 방법이 다른 곳과 비교했을 때 특별할 건 없다. 단, 신선한 해산물을 사용하고 자연산 송이버섯이 들어간다는 것뿐. 가을에 송이버섯을 대량 구매해서 급속 냉동해 일 년 내내 사용한다.

2 대가의 한 수, 동파육. 최현석 셰프가 강력 추천한 목란의 대표 메뉴로 익힌 삼겹살에 간이 다 밸 수 있도록 6시간 조린다. 때문에 하루 전에 예약해야 맛볼 수 있는 귀한 음식이기도 하다. 제철인 중국 채소 카이란과 함께 먹으면 신선놀음 부럽지 않다.

기획 레몬트리 이미주, 사진_전택수(JEON Studio)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