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미래] 원자 현미경으로 '분자 도미노 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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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7면

아주 작은 원자.분자의 구조를 볼 수 있게 해주는 원자현미경이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물질 표면에 원자들이 어떻게 늘어서 있는 지 보기만 하던 '관찰 도구'에서 벗어나 나노(10억분의 1m로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물질들을 직접 조작하는 도구로 쓰임새가 다양해지고 있는 것.

과학자들은 원자현미경을 이용해 원자나 분자를 집짓기 블록처럼 다루는가 하면, 길쭉한 분자를 세워놓고 도미노 게임까지 하고 있다.

이런 조작법을 이용해 분자 몇개로 이뤄진 계산 소자까지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또 원자현미경으로 DNA의 결합이 얼마나 질긴지를 정확히 측정해 내는 등 바이오 분야에도 이용이 활발하다.

원자현미경은 사람이 손가락 끝으로 물체를 더듬어 모양을 알아내는 것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원자현미경에는 끝에 단지 원자 몇개만 달렸을 정도로 뾰족한 탐침이 있어, 이것으로 물체의 표면을 더듬어 둥글둥글한 원자들이 늘어선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다.

마치 손가락으로 계란판을 더듬는 광경을 상상하면 된다. 이때 달걀은 원자에, 손가락은 원자현미경의 탐침에 해당한다.

'더듬는다'니 원시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이같은 방식의 원자현미경은 광학현미경보다 1만배 이상 높은 배율을 자랑한다. 그래서 원자들의 배열까지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원자 레고 놀이=원자현미경의 특징 중 하나가 탐침의 위치를 아주 정밀하게 조종할 수 있다는 것. 위치 오차가 원자 반개 크기 정도인 0.0000001㎜(0.1 나노m)보다 작다.

이런 위치 정밀도를 가진 탐침에 전기를 가해 원자를 붙여 들어올리는 등 기중기로 짐 옮기듯 하는 기술이 나와 있다. 원자를 다시 내려놓으려면 전기를 없애거나 전기의 +, - 극성을 바꿔주면 된다. 원자들을 들었다 놨다 마치 레고 블록 다루듯 하는 것이다.

미국 IBM의 연구진은 이런 방법으로 구리판 위에 철 원자를 배치해 한자로 '원자(原子)'라는 글씨를 썼다. 동그란 원자들이 늘어서 글자의 획을 이뤘다. 글자 하나의 크기는 가로 세로 4~5 나노m. 이 정도면 교과서 한 페이지에 1천조개 이상의 글자를 쓸 수 있다.

서울대 국양(물리학과) 교수팀은 원자현미경으로 도넛처럼 생긴 벤젠 분자 둘을 붙였다 떼었다 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같은 실험들은 초고집적도의 메모리 소자 등을 개발하기 위한 기초 연구다. 지금의 반도체 소자는 정보를 0과 1로 바꾸어 저장하는데, 예를 들어 벤젠 분자의 경우도 하나만 있으면 0, 둘일 때를 1로 해서 메모리로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면 벤젠 분자 정도 크기에 하나의 정보를 담게 되므로 지금보다 집적도가 1천배 이상 높은 메모리를 만들 수 있다.

국양 교수는 "원자 하나하나를 다루는 방식은 아직 속도가 대단히 느린데다가, 원자를 한곳에 놓아도 얼마 뒤에는 저절로 다른 곳으로 옮겨가버리기 때문에 안정성 문제가 있다"며 "실용화까지는 더 많은 연구와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분자 도미노=최근 IBM 새너제이 연구소의 안드레아스 하인리히 박사팀은 분자로 도미노 게임을 했다고 세계적인 과학학술지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이들은 구리 위에 일산화탄소(CO) 분자를 배열했다. 그러면 CO는 탄소(C)가 아래, 산소가 위에 오는 길쭉한 모양으로 구리판 위에 서게 된다.

이 때 그중 하나에 탐침으로 충격을 주면 도미노 쓰러지듯 주변의 CO들이 잇따라 넘어갔다. 이렇게 도미노 현상이 일어나도록 분자를 배치한 것 자체가 원자현미경으로 분자를 조작하는 기술의 극치라고 평가받았다.

하인리히 박사 등은 더 나아가 분자 도미노를 이용해 간단한 계산 소자까지 만들었다.

예를 들어 한쪽에서 '1과 1을 더하라'는 신호에 해당하는 도미노를 넘어뜨리면 반대편 끝에서는 여러 도미노 중에 '2'를 나타내는 것만 쓰러지게 하는 식이었다. 이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작은 연산 소자로 기록됐다.

◇DNA 사슬 끊기=현재 DNA의 유전자 조작은 X선을 쬐어주거나, 바이러스가 유전자의 일부를 바꿔치기하는 방법 등을 사용한다.이 방법의 단점은 여러 염기 중 원하는 단 한개만 바꾸는 미세 조작이 대단히 힘들다는 것.

과학자들은 원자현미경이 이런 문제도 해결할 것으로 보고 있다. 원하는 부분만 결합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다른 분자를 집어넣는 조작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작의 첫단계는 원하는 위치의 결합을 끊는 것. 미국 해군연구소의 리처드 콜튼 박사팀이 이를 해냈다. 연구진은 결합을 끊는 데 필요한 힘도 측정했다. 힘의 크기는 탐침을 아주 작고 얇은 특수 판에 연결해 판이 휘는 정도로부터 알아냈다.

연구팀은 "위치에 따라 조금씩 달랐으나 대체로 1백억분의 1g 무게의 추를 매다는 정도의 힘이면 DNA 결합은 끊겼다"고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MIT 대학의 코르티즈(생물학과) 교수는 원자현미경을 이용해 '종벌레'의 꼬리가 얼마나 훌륭한 스프링인지 알아보는 연구를 진행 중이다.

기본적인 방법은 DNA의 결합력을 실험할 때와 같다. 종벌레는 하나의 세포와 긴 꼬리로 이뤄진 작은 생물. 0.01㎜ 길이의 몸통이 꼭 종처럼 생겼고, 여기에 0.05㎜ 정도 되는 긴 꼬리가 달렸다.

가끔씩 이 꼬리는 순식간에 스프링처럼 수축.팽창하는데, 코르티즈 교수팀은 실험을 통해 주변에 칼슘 성분이 많아지면 꼬리가 순간적으로 수축하는 것을 확인했다. 연구진은 현재 칼슘의 농도와 꼬리의 수축하는 힘과의 관계 등을 연구하고 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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