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 돋보기] '그때그때 다른' 뺑소니 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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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대법원 2부는 14일 음주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를 내고 달아난 혐의로 기소된 배모(55)씨에 대해 "도주차량(뺑소니) 혐의는 인정할 수 없다"며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창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뺑소니 여부는 사고가 난 경위와 내용, 피해자의 부상 정도, 사고 후의 정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면서 "사고 운전자가 피해자 구호 등의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고 인정되지 않는 경우에는 피해자를 구호하지 않고 사고 현장을 떠났더라도 도주차량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사고 후 피해자가 배씨의 아내에게 '괜찮다'고 말한데다 배씨가 경찰관이 도착한 뒤 사고 현장을 떠난 점, 피해자가 목이 뻐근한 정도로 부상이 별로 심하지 않았던 점 등을 보면 피해자에 대한 구호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배씨는 2003년 11월 혈중 알코올 농도 0.064% 상태로 운전하다 이모(33)씨의 승용차를 들이받아 차량을 파손시키고, 전치 2주의 부상을 입히고도 현장을 떠난 혐의로 기소돼 1, 2심에서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번 사건의 경우는 부상 정도가 워낙 가벼웠고 배씨가 경찰관이 올 때까지는 사고 현장에 있었다는 점이 인정돼 무죄가 내려졌지만, 일단 사고를 냈다면 연락처를 알리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현장을 떠나서는 안 된다.

뺑소니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사건의 비난 가능성, 피해 상황 등 구체적인 사건 내용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2002년 보행자의 발을 치어 전치 4주의 부상을 입힌 뒤 피해자를 병원에 데려다 주기는 했지만 연락처를 남기지 않은 택시 운전사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

대리인에게 교통사고 수습을 맡긴 경우에도 뺑소니가 아니라고 안심해선 안 된다. 법원이 음주.무면허 운전자들이 사고 현장에서 도망가는 것을 막으려고 사고 현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급박한 사정이 있었는지를 따져 유.무죄 여부를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문철 변호사는 "뺑소니범으로 몰리지 않으려면 피해자를 가급적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고, 연락처를 남기고 경찰이나 보험사에 연락해 기록을 남겨둬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현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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