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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9)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02)|『조선문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이렇게해서 『조선문단』은 1924년 10월 창간되어 1926년 방인근의 빚때문에 경영할수가 없어서 판권을 남진우한테 넘기고 말았다. 『조선문단』은 3년동안이나 버텨 당시의 문예잡지로서 최장수를 누렸고 많은 소설가 시인을 길러내 문언에 끼친 공로가 컸다. 이 점에 대해 방인근은 이렇게 쓰고 있다.
『「조선문단」이 간행되던 3년동안 소설·시·평론 등 문예작품이 전무후무할만큼 대량으로 산출되었고 그 질에 있어서도 걸작들이 많았다. 소설에는 기성문인으로 춘원·횡보·동인·빙허·도향·늘봄 등 제씨가 일대의 주옥명편을 냈고, 시로는 안서·요한·월탄·제씨가 아름답게 시단을 장식하였다. 순전히 「조선문단」이 산출한 작가로는 최서해·한×야·박화성·채만식·임영빈제씨가 있고, 간접의 관계로서는 주요섭·최독견·이종명·김일섭씨 등이 있다. 시인으로는 조운·이은상·이장희제씨가 있고 간접관계로는 양주동·김동환·홍노작·이상화·변영노·김동명씨 등이 있었다.』
사실 『조선문단』은 문단에 대한 공헌이 컸는데 춘해가 문단에 대해 공헌한 것은 그의 통속적인 장편소설보다도 『조선문단』을 꾸준히 내서 한때 문단을 융성하게 만든데 있다. 우리나라 문단이 융성했던 때가 두번 있었는데, 첫번째는 방인량의 『조선문단』 시대였고, 두번째는 태평양전쟁이 시작될무렵 상허 이×준이 주재해 발간하던 『문장』시대였다.
이 『문장』시대도 『조선문단』시대를 방불케하는 백화료난의 문단황금시대였다.
잡지를 그만 둔 춘해는 얼마후 기운을 다시 차려 1934년 동아일보에 연재소설 『마도의 향불』을 실었고, 이어 『쌍홍무』 『새벽길』 『방낭의 가인』 등의 장편소설을 썼다. 매일신보에도 춘해는 연재소설을 많이 썼는데, 원고료를 받으러 오는 날이면 횡보와 백화한테 걸려 술을 내지 않고는 못 배겼다.
춘해가 나타나면 백화는 벌써 눈치채고 스르르 학예부족으로 온다. 『춘해, 오늘 돈 많이 탈테니까 한잔 톡톡히 내야 하네.』
얌전하게 원고료 나올 때를 기다리고 앉았는 춘해한테 백화는 선수를 친다.
『돈 많이 타긴 무얼 많이 타. 학예부장이란 사람이 쩨쩨해서 돈을 많이 주어야지. 거 참, 원고료 올리래도 어떻게 되었어?』
춘해는 애꿎은 화살을 나한테로 돌렸다.
『춘해 원고료는 아마 제일 비쌀게요. 남들은 원고지 칸을 꼭꼭 채워 쓰는데 춘해는 흘림글씨로 휘갈겨 한줄에 대여섯자는 덜 쓰니 그게 얼마나 이익이냐 말예요. 원고지 스물넉장이 한회분인데 스무장도 못될거야. 그리고 버젓하게 스물넉장 쓴 원고료를 받아가면서 무슨 말이여요.』
그때 신문사 원고지는 한줄이 15자, 다섯줄이 한장이니까 한장에 75자가 든다. 이것이 24장이라야 소설 한회분이 되는데, 2백자 원고지로 치면 아홉장 가량된다. 이것이 2원이니까 한달이면 60원, 보통 월급장이 한달치월급이다.
춘해의 소설원고는 이렇게 서너장이 부족하므로 삽화에 공간을 많이 두어도 2단이 차지 않아 늘 말썽이었다. 반대로 횡보의 원고는 사이 사이에 잔글씨로 새치기 하는 일이 많고, 어떤 때는 다른 종이에다 써서 풀로 붙여 사이에 끼워 넣는 때도 있으므로 2단이 넘을 때가 많아 삽화를 잘랐다. 원고를 정하게 쓰는 사람은 춘원과 부당이고, 원고를 지우고 또 쓰고, 깨알만한 글씨로 군더더기를 붙이는 사람은 벽초였다. 벽초는 처음 쓴대로 그냥 둘 것을 괜히 고쳤다고 후회할 때가 많다고 하였다. <조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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