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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중정부장 김형욱 증언, 왜 신빙성 떨어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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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김종필(JP) 전 총리는 『김형욱 회고록』(1987년 김경재씨에 의해 출간·사진)이 엉터리투성이라고 지적했다. JP의 증언은 김형욱이 주장했던 숱한 얘기들의 근거를 무너뜨린다. 김형욱의 주장을 1차 자료로 인용한 언론계나 학계의 작업들은 비판적으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김형욱이 회고록에서 박정희 권력의 내부를 직접 보거나 겪었던 시기는 1961년 5·16에서 중앙정보부장직을 내려놓은 69년 10월 20일까지다.

김형욱이 미국 의회 증언에서 박정희 정권의 부도덕성과 독재성을 규탄한 핵심 아이템은 유신체제(72년)와 김대중 납치사건(73년)이었다. 유신과 납치 같은 70년대 대형 사건들은 김형욱이 현직에 있을 때 경험한 일이 아니다. 그가 실각이나 미국 도피 중인 상태에서 과거 중앙정보부 부하직원 등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토대로 구성했다. 전모 파악이나 정확성에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김형욱은 외부 취재를 통해 김대중 납치의 지시자를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JP는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내용을 토대로 납치사건 지시자로 이후락을 지목했다.

 김형욱이 권력 무대의 중심에서 관여했던 사건들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5·16거사와 관련, 김형욱은 60년 11월 9일 JP와 자신을 포함한 육사 8기 동기생 9명이 박정희 장군의 신당동 자택에서 “혁명을 결의하고 박 장군을 지도자로 모시기로 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그러나 JP는 “ 박 장군을 혁명지도자로 모시기로 결의한 건 61년 4월 7일”이라고 못 박았다. 62년엔 중앙정보부장 JP가 민주공화당을 사전조직하고 있는 게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문제가 됐다.

당시 최고위원이었던 김형욱은 회고록에서 “모택동 노선과 일치하고, 교육은 공산당식 밀봉교육이었다”며 JP의 좌익성을 암시했다. JP는 이를 부인했다. 공화당 사전교육에 참여했다 나중에 민주화투쟁을 한 예춘호 전 의원도 “사전교육은 윤천주·김성희 교수 등과 세미나 형태로 운영됐다. 교육자와 피교육자를 차단하는 밀봉교육은 없었다”고 증언했다. 69년 3선 개헌 작업 때 김형욱 정보부장은 공화당의장인 JP에게 “끝까지 반대하면 박 대통령이 제2의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박정희 후계자는 당신 아니냐. 그러니 3선 개헌을 찬성하라”라며 설득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JP는 “김형욱이 나한테 무엇을 설득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고 일축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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