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은 격리진료소 … “대형병원 응급실에 의무화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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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대전시 건양대병원 격리병동에서 의료진이 메르스 확진 환자를 진료하고 있다. 이 병원에서는 메르스 감염 환자 7명이 입원 치료 중이다. [사진 건양대병원]

8일 오전 8시 서울 강동경희대병원은 본관 1층 유리문 앞에 칸막이(파티션)를 쳤다. 고열 환자 등 메르스 의심 환자를 먼저 분류하는 예진실이다. 칸막이 안에는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책상과 의자를 놓았다. 사무실에서 쓰는 일반 칸막이라 위와 옆이 뚫려 있다. 1층 로비 입구에 세워진 적외선 열감지카메라로 체온이 37.5도 이상인 환자는 모두 예진실을 거쳐야 한다. 여기서 좀 더 심한 호흡기 질환 증상이 발견되면 본관에서 30m 떨어져 있는 컨테이너 진료실로 보낸다.

 이 병원은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76번(75·여) 환자가 거쳐간 병원이다. 이 환자가 응급실을 찾은 5~6일에는 별도의 예진 시설이 마련돼 있지 않았다. 병원 관계자는 “그동안은 확진환자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운영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 환자가 6일 거쳐간 건국대병원은 하루 전인 5일에야 고열 등의 증상이 있는 환자들을 위한 별도 진료소를 마련했다. 건국대병원 관계자는 “76번 환자는 처음에는 고관절 질환자로 미열만 있어 이 진료소를 거치지 않았다”고 말했다.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이 메르스 확산의 진원지가 된 이유는 감염병 환자를 막아낼 최전선인 응급실에 일반 환자와 메르스 환자가 한데 섞인 데 있었다. 76번 환자가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을 거쳐 강동경희대병원과 건국대병원 응급실에 갈 때까지 이들 병원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환자분류체계(트리아지(triage)·환자 우선 진료를 위한 분류)에 따라 메르스 환자를 예진할 선별진료실(임시격리실) 설치가 늦어진 것이다. 확진환자 34명이 나온 삼성서울병원은 지난 3일에야 응급실 앞에 천막 시설을 설치했다.

 이종구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전 질병관리본부장)는 “응급실로 오는 환자를 미리 분류해 호흡기 질환 환자는 별도 로 뺐어야 하는데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이 14번 환자에게 3일간 무방비로 노출됐다”고 말했다.

 본지가 전국 43개 대학병원을 조사한 결과 이날 기준 대부분의 병원이 메르스 의심 환자를 분류할 별도의 선별진료실 설치를 마쳤다. 시기는 각각 달랐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등의 일괄적인 지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한병원협회는 지난 7일 ‘선별진료실(병원에 천막 또는 컨테이너) 마련과 표지판 설치’를 권고했다.

 서울아산병원은 확진환자가 거쳐간 다음날인 지난달 27일 병원 내부에 별도의 선별진료실을 설치했다. 6명의 확진환자가 발생한 31엔 서울대병원과 중앙대병원이 외부 임시격리실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신촌·강남세브란스병원(1일), 한양대(3일)·강북삼성병원(4일) 등도 지난주에 병원 건물 밖에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다. 고려대안암병원과 울산대병원은 8일에야 설치했다.

 평소 대형병원 응급실은 환자가 과도하게 몰려 보호자, 의료진이 뒤엉켜 있다. 가벼운 감기나 배탈이 나도 응급실로 오기 때문에 대기시간이 길어진다. 보건복지부가 응급실 병상 수에 비해 환자가 얼마나 많이 붐비는지 과밀화지수를 산출해 보니 삼성서울병원은 지난해 기준으로 133.2%였다. 서울대병원(175.2%)·경북대병원(154%)·서울보훈병원(138.5%)에 이어 전국에서 4위였다. 과밀화지수가 100%를 넘는다는 것은 응급실 병상보다 환자가 많아 간이침대나 의자, 바닥 등에서 대기하는 환자들이 생긴다는 의미다. 이러한 대형병원이 전국에 10곳이나 된다.

 미국·캐나다 등에선 응급실 내 감염을 막기 위한 지침이 구체적으로 마련돼 있다. 캐나다는 ‘호흡기를 통한 감염으로부터 직원·환자·보호자를 보호하도록 응급실에 분류구역을 만들고 적절히 환기를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미국에서는 격리가 필요한 환자를 진료하는 별도 치료실과 대기시설을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캐나다는 병원이 공공기관이고, 미국은 시설 인증이나 보험기관을 지정할 때 반영하기 때문에 병원들이 이러한 지침을 따른다.

 그러나 국내 의료법과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등에는 응급실을 찾은 전염병 환자의 감염 관리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이 없다. 질병관리본부가 대한의료관련감염관리학회와 2010년에 마련한 ‘응급실에서의 감염관리 표준지침’이 있긴 하나 강제성은 없다.

 이종구 교수는 “선별진료실 설치가 제각각인 것은 정부가 일괄적인 지침을 내려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관련 법이나 시행규칙에 포함시키고 지자체와 중앙정부·병원이 설치 비용을 함께 부담하면 강제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유미·신진·임지수 기자 yumi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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