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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경민의 시시각각

내년 총선 내후년 대선 필승 카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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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정경민
경제부장

5월 20일은 검역의 날이다. 1886년 이날 우리나라 최초의 방역 규정인 ‘불허온역진항장정(不許瘟疫進港章程)’이 제정된 걸 기념했다. 장티푸스 같은 ‘온역(瘟疫)’이 발생한 곳에서 온 선박은 반드시 검역하도록 했다. 한데 하필 이날 국내 첫 메르스 환자 확진 판정이 나왔다. 중동에서 귀국한 뒤 병원 네 곳을 전전했던 68세 남성이었다. 보건복지부 산하 질병관리본부는 제3회 검역의 날이었던 이날 충북 충주에서 체육대회를 열었다. 노란색 티셔츠를 맞춰 입은 직원들은 운동장에 모여 족구를 했다. ‘중동의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 사스)’이라는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이 국내 상륙한 게 확인된 날 검역의 최전방엔 이미 구멍이 뚫려 있었다. 129년 전 장티푸스의 전염성을 간파했던 조상들이 봤더라면 기겁했을 광경이다.

 최전방만 그런 게 아니다. 감염병과의 전쟁은 3차 감염자를 막는 1차 방어선에서 결판난다. 최초의 ‘수퍼 전파자’가 옮긴 2차 감염자는 숫자가 적다. 대부분 병원 안에서 바이러스를 옮겨 추적도 쉽다. 그러나 3차 이상으로 번지면 차원이 달라진다. 소·닭과 달리 사람은 이동을 전면 금지하는 ‘스탠드스틸(standstill)’ 같은 극약 처방을 쓰기 어렵다. 잠복기 동안엔 멀쩡한 메르스는 더욱 그렇다. ‘지금껏 아무렇지 않은데’라는 일상의 관성이 방역망을 마비시킨다. 첫 환자가 나온 지 보름 만에 격리 대상자가 수천 명으로 불어난 까닭이다. 이 방어선이 뚫리면 방역망은 무너진다. 그래서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 보건복지부만으론 어림 없다.

 한데 3차 감염자가 처음 발생한 지난 2일 박근혜 대통령은 전남 여수에서 열린 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에 갔다. 총리는 공석이었고 총리대행인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유럽 출장을 떠났다 6일에야 귀국했다. 청와대 현정택 정책조정수석이 부랴부랴 긴급대책반을 만들긴 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총리가 빠진 대책반은 유명무실했다. 학교 휴업을 놓고 복지부와 교육부 장관의 말이 엇갈리고 서울시와 복지부가 정보 공유를 둘러싸고 충돌한 것만 봐도 그렇다. 메르스가 1차 방어선을 뚫은 순간 방역의 지휘부는 무력했다.

 메르스에 뚫린 건 방역 전선만이 아니다. 부동산·증시 덕에 겨우 기력을 되찾는 듯했던 경기 불씨도 메르스 삭풍을 만났다. 성장을 이끌어온 수출 전선은 아베노믹스의 엔저 공습에 힘없이 무너졌다. 수출 금액뿐 아니라 물량까지 줄어든 건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 그나마 구원병으로 기대를 모은 소비마저 메르스라는 복병을 만났다. 쇼핑몰과 관광지는 물론 거리조차 썰렁해졌다. 말라버린 내수에 단비가 됐던 유커(遊客·중국인 관광객)도 발길을 돌리고 있다.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 후 내수가 꽁꽁 얼어붙었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나라 밖에선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연내 금리 인상을 을러대고 있다. 선진국 시장 침체를 메워준 중국의 성장세마저 꺾였다.

 설상가상 정치인 출신 경제부처 장관들의 마음조차 벌써 내년 총선거라는 콩밭에 가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달 하순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을 시작으로 부처마다 관광 활성화 대책, 벤처·창업 활성화 대책, 청년 일자리 대책을 앞다퉈 쏟아내려 했던 것만 봐도 그렇다. 내년 총선까진 1년도 채 남지 않았다. 서슬 퍼렀던 집권 1, 2년차에도 못한 걸 이제 와 잔뜩 벌려놓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금리 결정권을 쥔 한국은행도 눈치만 보고 있다. 심장이 멎어가는 환자를 앞에 두고 심폐소생술 대신 심장병의 근본 원인 치료부터 하라고 한다.

 사면초가(四面楚歌)다. 그러나 위대한 리더십은 언제나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빛을 발했다. 위기는 곧 기회이기도 하다. 메르스 공포를 잠재우고 벼랑 끝에 내몰린 경제를 구출할 리더십을 발휘하라. 그 어떤 정치 공학이나 수사(修辭)를 들먹인들 지금은 이보다 확실한 총선·대선의 필승 카드가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안 보인다.

정경민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