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2세 여왕 대관 50돌 맞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1면

영국 왕실이 통치하지는 않지만 군림하는 것은 확실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대관식(戴冠式.Coronation.왕관을 쓰는 공식 즉위 행사)을 거행한 지 반세기를 기념하는 2일 간간이 비가 뿌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영국인들이 기념식이 열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에워싸고 여왕을 기다렸다.

'간소한 행사'를 강조한 여왕은 여덟마리 말이 끄는 황금마차 대신 검은 리무진을 이용했다. 여왕은 황금빛 정장과 모자로 화려함을 대신했다. 오전 11시30분 정각 여왕이 부군 필립공(公)과 함께 사원에 도착했다.

전통에 따라 웨스트민스터 대학 웨슬리 카 학장과 교직원 대표가 "신의 이름으로"라고 외치며 여왕을 맞았다. 77세의 여왕은 신민(臣民)들의 환영에 엷은 미소로 보일듯 말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중한 코러스가 고딕 사원에 울려퍼졌다.

영국인 어느 누구도 이라크전 참전이나 유럽 단일 통화 가입에 대한 여왕의 의견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여왕은 통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여왕이 어느 꽃을 좋아하고, 어떤 옷을 입고, 어느 경마장으로 나들이 가는지 궁금해 한다. 평소엔 그저 그렇게 자질구레한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 듯한 왕실의 존재는 잊을 만하면 이어지는 축제를 통해 거듭 되살아난다.

이번 행사는 어린이를 주빈(主賓)으로 삼았다. 사원에 초대된 가장 특별한 손님도 9세 된 소녀다. 행운의 소녀 루이사 해링턴의 심장은 두살배기의 박동 이상 뛰지 못한다.

그래서 심장수술을 기다리던 중 여왕에게 편지를 보내 "나도 공주가 돼 여왕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여왕은 소녀에게 공주용 연보라색 드레스를 선물하고, 소녀는 여왕에게 왕관 모양의 꽃다발을 바쳤다.

공식 기념행사가 끝난 뒤 궁으로 돌아온 여왕은 5백명의 어린이를 초대해 잔치를 벌였다. 이라크전에 참전한 군인의 자녀와 만성 질환을 앓는 아이들, 결손 가정 아이들을 불러 궁정 잔디밭에서 마음껏 뛰놀게 했다.

사실 여왕이 취임하던 당시 영국인들의 기대는 그 이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식량배급을 받으면서도 승전국이란 자부심을 앞세우던 영국인들은 엘리자베스 2세의 취임에 '엘리자베스 1세' 당시의 영화를 기대했다.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르고, 셰익스피어를 키워낸 16세기 제국의 꿈이다. 이름은 같았지만 시대는 너무 달랐다. 제국의 유산인 왕실의 비중도 줄어만 갔다.

특히 1990년대에 왕자들이 각종 스캔들을 일으키며 이혼하고, 97년엔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비운에 숨지자 왕실에 대한 국민의 거부감이 높아졌다. 한때 왕실을 없애자는 논의까지 나왔다.

그러나 지난해 취임 50주년 행사를 치르고, 이어 국민적 사랑을 받던 여왕의 어머니가 숨져 추모 분위기가 높아지면서 왕실에 대한 관심이 많이 회복됐다. 지난해 말 조사 결과 영국 국민의 70%가 왕실의 필요성은 인정했다. 그나마 그 정도의 품위 유지도 여왕의 상당한 공적으로 평가된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