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테일의 재발견] ‘만추’의 시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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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 ‘만추’(2011, 김태용 감독)는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감독은 시계라는 소품을 통해 그들 사이에 끊임없는 ‘거래’ 관계를 만들어 낸다.

올해는 이만희 감독이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되는 해다. 40대 중반에 요절한 이 천재 감독의 영화 중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절반 정도. 안타깝게도 우린 아직 ‘만추’(1966)의 필름을 찾지 못했고, 그렇게 이 영화는 전설이 되어가고 있다. 다행이라면 여러 편의 리메이크가 있다는 것.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1975)이 있었고, 김수용 감독은 김혜자를 주인공으로 ‘만추’(1982)를 내놓았다. 그리고 2011년, 네 번째 ‘만추’가 나왔다.

현빈과 탕웨이가 주인공을 맡고, 김태용 감독과 탕웨이의 인연을 맺어준 ‘만추’는 미국 시애틀을 배경으로 한다. 애나(탕웨이)는 남편을 죽이고 형무소에 갇힌 살인범. 훈(현빈)은 돈 많은 여자들을 상대하는 지골로다. 애나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위해 72시간의 특별 휴가를 허락받았고, 훈은 갱의 아내인 옥자(김서라)와 관계를 맺은 뒤 쫓기는 중이다. 그들은 버스에서 우연히 만나며, 이때부터 그들 사이엔 시계를 매개체로 한 거래가 시작된다. 황급히 버스에 탄 훈은 차비가 부족하다. 이때 그의 눈에 애나가 들어온다. 처음 보는 그녀에게 30달러를 빌린 훈은 자신의 시계를 주며 나중에 돈을 갚을 때 찾겠다고 한다(사진 2). 애나는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계속 훈의 시계를 거부한다. 이것은 인간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혹은 마음이든 물건이든 주고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의 폐쇄적인 내면에 대한 비유다. 시애틀 버스 터미널에 내린 두 사람. 여전히 애나는 시계를 거부하고, 훈은 명함을 주며 연락하라고 한다. 애나는 명함을 조용히 쓰레기통에 버린다. 각자의 길을 떠나는 두 사람. 이후 이야기는 ‘거래’라는 이 영화의 테마를 더욱 확장한다. 애나는 오빠의 보증금으로 휴가를 얻을 수 있었는데, 사실은 돌아가신 어머니의 집을 팔기 위해서는 애나의 서명이 필요한 상황이었다(사진 3). 일종의 거래인 셈이다. 한편 훈은 몸을 팔고 돈을 받는다(사진 4). 역시 거래다.

그들은 버스 터미널 앞에서 우연히 재회하고, 훈은 돈을 갚으려 한다. 이때 애나는 말한다. “나랑 잘래요?” 하지만 관계는 실패한다. 이후 그들은 함께 시간을 보낸다. 거래의 상징적인 공간인 시장에서 말이다. 밤이 되어 헤어지는 두 사람. 애나는 하루 동안의 에스코트에 10달러를 건넨다. 훈은 애나의 모텔 방에 시계를 남겨두고 떠난다(사진 5).

이처럼 애나와 훈 사이엔, 시계를 가운데 놓고 끊임없이 돈이 오간다. 하지만 이것은 진심을 감추는 위장이다. 감옥으로 돌아가기 위해 애나가 버스에 탔을 때, 창 밖에서 훈은 계속 돈을 흔들고(사진 6) 버스에 오른다. 안개 때문에 어느 카페 근처에 정차한 버스. 애나는 시계를 돌려주려 하고, 훈은 기념으로 가지라고 한다(사진 1).

그리고 그곳에서 그들은 드디어 마음을 열고 키스를 나눈다. 하지만 훈은 누명을 쓰고 체포된다. 잠시 잠에 들었다 깬 애나. 훈이 사라진 걸 깨닫는다. 그녀의 손목엔 훈의 시계가 있다(사진 7). 이제 시계는 하나의 정표가 된다.

2년 뒤 출소한 애나는 훈을 만나기 위해 그 카페를 다시 찾는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말한다. “안녕, 오랜만이네요.” 이 대사는 2년 전 훈이 애나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버스 터미널 앞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훈은 말한다. “지금 몇 시죠?” 그들의 우연한 인연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어쩌면 ‘시간’이었고, 이젠 애나가 훈을 기다릴 때다. 다시 그 시계를 돌려주기 위해.

글=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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