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홍구 칼럼] 자격지심 굴레서 벗어나자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아무리 나라의 사정이 뒤숭숭하더라도 세월은 가고 6월은 찾아왔다. 노년층은 아득하면서도 생생한 6.25의 처참한 기억을 되새길 수밖에 없고, 중년들은 민주화투쟁이 절정에 이르렀던 1987년 6월을 생각할 것이며, 젊은이들은 지난해 이맘때 함께 외쳤던 "대~한민국" "오-필승 코리아"의 함성이 아직도 귓전에서 진동하는 흥분을 느낄 것이다.

사실, 그 월드컵의 흥분과 감동이야말로 젊은 세대뿐 아니라 온 국민이 잊을 수 없는, 아니 언제까지나 즐기고 싶은 공동의 경험이었음에 틀림없다.

*** 6월에 외쳤던 함성이 아직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었던 한.일 월드컵대회 1주년을 맞는 바로 이때에 한.일 정상회담이 열리게 된 것은 그 의의가 더욱 크다 하겠다.

96년 6월 1일, 2002년 월드컵 개최국 선정 최종투표 직전 국제축구연맹(FIFA)은 일본과의 공동 개최를 제의했고 우리가 서슴지 않고 이에 동의한 것은 단순한 승패에 대한 계산 때문만은 아니었다.

20세기에 있었던 한.일 간의 불행한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21세기의 첫 월드컵을 공동 개최함으로써 전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이웃을 함께 만들어 가는 계기로 삼겠다는 꿈과 결의가 있었기에 단숨에 합의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예상을 넘어선 2002년 한.일 월드컵대회의 성공은 바로 그 꿈이 실현 가능한 것이었음을 입증하였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 가운데서 민주정치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확실히 실천하고 있는 국가로 한국과 일본을 꼽는 데 이론의 여지는 없다.

'민주국가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국과 일본은 다 같이 시민사회의 발전을 바탕으로 한 아시아 지역공동체의 터전을 닦아가고 있음을 이번 기회에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유럽연합의 급속한 발전도 원초적으로는 민주공동체라는 기본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장의 세계화와 지역화를 강조한 나머지 민주국가의 연대가 지닌 중요성을 가볍게 취급하는 잘못을 우리는 반드시 피해야 한다.

민주국가의 정치는 시대적 상황, 국민적 성향, 그리고 선거의 결과에 따라 때로는 보수 쪽으로 혹은 진보 쪽으로 기울게 된다. 그러나 일본정치처럼 일관된 보수성향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한 일본이 오늘날 더욱 우경화의 색채를 짙게 띠고 있다. 그것은 일본 사회와 문화의 뿌리깊은 보수성으로 설명될 수도 있겠지만 근자의 우경화의 직접적 충동제가 된 것은 북한의 핵 문제임이 틀림없다. 이번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북핵 문제가 중요한 의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정부의 입장은 분명하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절대로 수용될 수 없으며 우리와 국제사회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이를 포기하도록 설득하고 압력을 가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를 비군사적 방법에 의한 평화적 해결로 이끌기 위해 끝까지 노력할 것이며, 한국과 동맹국이 지닌 압도적 힘의 우위는 이런 외교적 타결을 성공시키는 데 충분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따라서 한.미 간의, 그리고 한.일 간의 공동 전략을 확실히 다지고 국제사회의 동참을 확보하는 과제만이 남은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난번 한.미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으며 이번 한.일 정상회담도 긍정적 성과가 있으리라고 기대된다.

*** 대통령 외교자세 논란 끝내길

아무리 국내 정치상황이 어지럽더라도 나라를 대표한 대통령의 외교활동을 평가하는 데 인색할 필요는 없다. 대통령의 외교자세가 당당해야 하느니, 저자세라느니, 심지어 굴욕적이라는 외교 스타일에 관한 소아적인 논란은 제발 끝냈으면 좋겠다.

세계 12위의 경제, 성공적 민주화의 효시, 국민적 꿈의 결집으로 이루어낸 월드컵 4강 신화를 들추어내지 않더라도 이제는 체질화된 자격지심의 굴레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해방시킬 때가 왔다.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이 우리의 가장 오래된 동맹국임을, 그리고 세계 제2의 경제대국인 일본이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임을 편안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한국이 지닐 자세인 것이다.

이홍구 중앙일보 고문.前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