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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범벅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점심시간이 가까왔는지 시장기를 느끼게 되어 읽던 책을 소파에 접어둔 채 시계를 올려다 보는데 현관 벨소리가 울렸다.
삐축이 열리는 문 틈새로 『얘기 엄마, 이것 맛좀 봐요』하시며 옆집 할머니께서 김이 모락 모락 오르는 누런 호박으로 쑨 범벅그릇을 내미시는게 아닌가.
『봉에 시골 딸네집에 다니러 갔다가 울타리 아래 두어 포기 옮겨 심어 주고 왔더니 벌써 영글었다고 외손주 녀석이 어제 달덩이만한 호박을 가져 왔잖우.』
칠순이 넘으신 할머니는 사뭇 즐거운 표정이다.
『감사합니다. 잘 먹겠읍니다.』
잔잔히 웃으시며 문을 닫으시는 할머님께 몇번이고 감사의 절을 하고는 볕이 좋은 창가에 앉아 범벅의 맛을 음미해가며 먹었다.
어릴적 우리 할머니께서 가을과 겨울이면 가끔 별미로 쑤어 주시던 호박범벅이다.
큰 가마 솔에 호박을 은근히 삶아서 으깨어 찹쌀 가루와 함께 큰 주걱으로 저어가며 끓이다 삶은 팥을 넣어 한소끔 더 뜸을 들인 후 차게 식혀 물김치와 같이 온 가족이 어우러져 먹던 기억이 뱃살의 날갯짓처럼 아련히 떠 올랐다.
오늘 저녁엔 할머님이 평소에 즐겨 잡수신다던 동태 고추장 찌개를 맛있게 해서 죽을 담아 오셨던 그릇에 한그릇 담아다 저녁 진짓상위에 올려 드려야겠다.
가을은 이런 인정이 있기에 더욱 풍요로운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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