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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사0을 찾자"|서울·지방·학자·유지 2백여명 뜻모아 추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우리나라 최대 실학자의 한사람이며 탁월한 문학자인 연암 박지원의 뜻을 기리는 움직임이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우선 연암의 사적비를 세우자는 운동이 서울과 지방에서 동시에 일고 있다. 연암을 연구하며 그를 흠모하는 서울의 학자들과 경남 안의를 비롯한 함양· 거창유지들이 뜻을 합하고 있다. 안의는 연암이 길지 않은 관직생활중5년간 현감으로 있던 곳으로 그의 생애와 저작에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곳이다.
현재 연암의 흔걱은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다.
안의는 물론 그의 생외지인 서울에서도 마잔가지. 휴전선 바로 이북의 장단에 그의 묘소가 있으나 가볼길이 없다.
장단의 묘소는 장대하게 차려져 있다고 한다.
안의에 먼저 사적비라도 세워보자는 움직임은 이렇게 시작됐다.
지난 7월 방학을 틈타 연암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안의를 찾아갔다. 결코 이곳을 떼어놓고는 연암을 생각할수없는 안의를 찾아와 그들은 연암이 남긴 어떠한 자취도 찾을수 없었다. 학자들은 河忠鉉 (7l· 안의고이사장) 이강택(59·안의면장)씨등 이동네 유지들과 만나 우선 연암사적비 건립운동을 펴기로 합의했다.
이날 참여한 학자들은 이우성 (성균관대) 강만점(고려대) 안병직(서울대) 송재소(성균관대) 임형택(성균관대) 이호형 (성균관대) 이동환(고러대) 이만열(숙명여대) 금진균(서울대) 금태영 (경희대) 정창렬(한양대) 정윤형(훙익대)금시방(성균관대) 성대경 (성균관대) 金慶泰(이화여대) 박찬일(한국의국어대)교수등 16명. 이들은 이자리에서 30여만원의 기금을 즉석 모금하기도 했다.
한편 건립추진위원회 결성준비로 바쁜 하충현씨는 『안의와함양·거창의 교육계·관계· 종교계·실업계 유지 2백여명으로 추진위원회를 구성중이며 현재 적극적인 호응속에 10월중 발족이 가능할것 같다』 며 밝은 표정이다.
서울의 학자들도 한국고전문학연구회·한국한문학연구회등 국문학· 역사학분야 6개학회로 후원회를 결성, 이사업을 지원키로했다. 사적비는 옛안의현 동헌터인 현재의 안의국민학교 교정에세워질것으로보인다.
학자들은 안의에서의 연암이 같은시대 여러면에서 그와 쌍벽을 이루던 강률에서의 다산과 비교되기도 한다고 지적한다.
연암은 안의현감으로 재직시 (56∼60세) 행정가로서의 업적도 훌륭했지만 그의 저작활동 또한 가장 왕성했던시기로서 대표적인 저작이 대부분 이때 이뤄졌다. 연암이 안의에 있는 동안 이곳엔 당시 서울의 일류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전국문인들의 집결지가 되기도 했다. 당시 정사는 일에바빠 가고싶어도 서울을 못떠나는 박제가에게 특별휴가를 주어 안의에 다녀오도록했다는 기록도 있다.
연암이 임기를 채 마치지 못하고 떠나게 됐을때 안의사람들은 길을 막고 눈물을 흘리며 떠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또 선정비를 세우고자 했으나 연암은 이를 극력 말리고, 만약 세운다면 사람을 보내어 깨어버리겠다고까지 해 결국그 흔한 선정비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안의지방사람들과 학자들은 연암기념사업이 사적비 건립에 그치지 않고 연암기념관건립이나 현장복원사업까지 이뤄져 연암의 얼이 계승되기를 바라고 있다.

<안의=이근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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