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근영의 오늘 미술관] '쓰레기'와 '작품' 사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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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슨 빨랫대, 폐타이어, 부러진 우산, 깨진 항아리, 설교 카세트 테이프, 참이슬 소주병, 제비표 페인트 깡통, ‘믿음·소망·사랑’이라고 새긴 내무 액자-.

전시장 바닥에 나선형으로 깔아놓은 ‘작품’들이다. 서울 율곡로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리는 멕시코 미술가 아브라암 크루스비예가스(Abraham Cruzvillegas·47)의 개인전에 나온 ‘자가해체8: 신병(神病)’이다. 작품 제작을 위해 전시팀은 지난 1년간 전시장에서 나온 부산물 및 서울 시내 재개발 지역에 굴러다니는 물건들을 모아왔다. 작가는 이를 하나도 버리지 않고 전시장에 늘어놓았다. 떠나간 이들이 두고 간 ‘무용지물’들은 7월 26일까지 전시장에서 관객을 맞이한 뒤 조심스럽게 포장돼 작가가 있는 멕시코시티로 배송된다.

크루스비예가스는 ‘국제 넝마주이’다. 이 작업은 2012년부터 로스앤젤레스·멕시코시티·파리·런던 등지에서 진행해 온 ‘자가해체(Autodestruction)’ 연작 중 여덟 번째다. 현지의 부산물을 모아 전시한 이들 작품은 런던 테이트 모던, 뉴욕 뉴뮤지엄 등 유수의 미술관에 고가에 판매·소장되기도 했다. 크루스비예가스는 1968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나 멕시코 국립대학에서 철학·교육학을 전공했다. 모교에서 미술사·예술이론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본인이 나고 자란 멕시코의 사회·경제적 특성을 반영하는 영상 작업 및 라틴 아메리카의 지역성을 드러내는 설치 작업으로 이름났다.

쓰레기를 주워다 쌓고 해체하는 ‘땜질식’ 작업은 그가 겪은 멕시코의 근대화·도시화에서 출발했다. 그의 부모는 멕시코시티 빈민가에 정착해 직접 집을 짓고 살았다. 그와 동생들이 태어나면서 방을 늘렸고, 그림을 그려 팔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휠체어 생활을 하면서 집을 그에 맞게 고쳤다. 전시장 3층은 작가가 스무 살까지 살았던 그 집의 기억을 담았다. 리노베이션을 앞둔 아트선재센터의 벽을 허문 자리에 멕시코 집에 대한 영상과 사운드를 전시했다. 전시를 기획한 배은아 큐레이터는 “크루스비예가스는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벌어지는 재개발 현상과 그곳서 버려지는 사물을 매개로 개인의 정체성, 노동자의 권리 같은 주제를 실천적으로 다룬다”며 “쓸모 없어 보이는 사물에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하는 희망적 작업이기도 하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2012년 독일 카셀 도쿠멘타, 광주 비엔날레,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등에 참여했다. 2012년 양현미술상을 수상했으며, 오는 10월 런던 테이트 모던 터빈홀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터빈홀 프로젝트는 이 미술관의 간판 전시로 루이스 부르주아(2000), 올라퍼 엘리아슨(2003), 아이웨이웨이(2010) 등 현대 미술의 수퍼스타들이 거쳐갔다. 연간 500만명, 현대미술관 중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람객이 몰리는 이곳에 그는 런던 각지서 모은 흙을 쌓을 계획이다. 성인 3000원. 02-733-8945.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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