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26>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59>-조용만|신문사 술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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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백화와 횡보 이야기는 또 나올테니 이쯤 해두고 내가 멋모르고 신문사 패한테 끌려가 술 단련을 받던 이야기부터 시작해야하겠다.
들어가 보니 신문사 파는 술 마시는게 일인것 갈았다. 그때는 조·석간이 없고 석간 하나뿐이었으므로 하오4시에 석간이 나오면 일은 끝나는 것인데, 내일것도 준비할것이 있고 해서 앉아 있다가 다섯시 반쯤 되면 슬술 퇴근한다.
퇴근 후 삼삼오오 작반해 가는 곳이 어디냐 하면 술집이었다. 대부분이 선술집으로 동아·조선, 그리고 매신패들이 가는 데가 목천집이었다. 신문사에서 가까운 광화문 네거리 왼쪽 골목속에 있는 기와집인데, 안뜰을 양철지붕으로 덮고, 대청뜰을 술청으로 만들었다. 손님들은 섬돌위에 늘어서서 술을 마시게 돼 있는데, 다섯시 반쯤 들어서면 일찍 온 패들은 벌써 시작하고 있었다.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패는 동아의 현진건 이상범, 조선의 우승규 김규택 홍우백, 매신의 이승만 이용우 같은 주당들이었다. 이밖에 중앙의 노수현이 왔었고 이용우의 짝패인 최우석이 있었다.
입사하던날 이승만은 댓바람에 나를 이 목천집으로 끌고 갔다. 나는 그때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안갈수가 없어 따라갔었는데 목천집 신입생이라고 여러 사람들한테 인사를 시키고 술잔으로 공격해 오기 시작하였다.
첫번째로 인사를 하고 나서 『불가무일배』라고 해서 한잔, 다른패에서 또 『반갑습니다』하고 한잔, 이렇게 두잔이 되면 『주부쌍배』라고 해서 우수면 안된다고 기수인 석잔은 마셔야 한다며 또 한잔을 내민다.
이렇게 석잔을 마시고 나서 『이제는 더 못합니다』하면 청전같은 사람이 나서서 『삼소인데 안됩니다』하고 아무리 못 마셔도 석잔은 적으니 「오의」라며 다섯잔은 마셔야 한다고 우겨댄다.
나는 속으로 술을 권하는데 쓰는 문자가 많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억지로 한잔을 더 마신다. 이러고 나면 「오의」라고 다젓째 잔이 곧 들어온다.
그때 잔이란 큰 보시기 여서 꽤 크다. 이것을 연거푸 다섯잔쯤 해놓으면 과하다. 같은 친구끼리라면 그래도 괜찮지만 초면인 사람들이라 긴장이 돼 취하지도 않고 얼떨떨해진다. 『술 못 한다더니 잘만 드시는구려!』하고 묵로 이용우와 정재 최우석이 자꾸 권했다. 이때 나오는 문자가 「칠가」다. 다섯잔을 마셨으니 일곱잔도 마실 수 있다는 이론이다.
『대학 때 많이 마셨을걸. 일곱잔쯤은 문제없어요.』
이것은 나절로 우승규의 부추김이다. 나도 이때쯤 되면 취기도 돌아 사양도 안하고 받는다. 그러나 마침내 노심산이 나서서 『구월부가』라고, 아홉잔이 넘으면 안된다고 더 권하지 말자고 해 종지부를 찍는다.
이렇게 해서 해방이 되는데, 나만 남기고 또 다른 데로 더 마시러 가는 모양이었다.
이밖에도 술자리는 많아서 학예부라는 곳은 연예를 취급하는 곳이라 연극 영화 음악 미술단체에서 기사를 부탁하고 저녁에 요리집에서 한잔내는 일이 많았다. 이때 요리 집에는 각사에서 학예부 사람이 하나씩은 꼭 나오므로 이곳에서 서로 만나게 되는데, 홍×문과 이태×은 여기서 늘 만났다.
별로 술을 못 마시던 사람이 목천직패에 끼어 다니고 연회에도 자주 나가게되니 술이 자연히 늘게 되었다. 얼마안가 나도 한사람의 주명으로 행세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브란스의전에 강의를 맡은 관계로 술을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생들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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