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 지망생들 시각장애인 위해 목소리를 봉사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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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아나운서를 꿈꾸는 봉사자들이 서울 강서 점자도서관 녹음실에서 녹음 준비를 하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황주원·송철오·김유영·윤민지씨. 강정현 기자

"개츠비라는 분을 아실 텐데요?"

"개츠비? 개츠비가 누군데?"

6일 오전 서울 공항동 강서 점자도서관. 한 평 남짓한 녹음실은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읽는 여성의 낭랑한 목소리로 가득 찼다. 설명 부분은 차분하게, 등장 인물의 대화는 긴장감 넘치게 처리하는 솜씨가 1인극처럼 자연스럽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메인 뉴스 프로그램의 앵커를 꿈꾸며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는 김유영(25.여)씨. 그는 1년 넘게 2주마다 한 번씩 서울 시내 점자도서관을 찾아 시각장애인용 '녹음도서(오디오북)'를 녹음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2시간 넘게 책을 읽는 김씨의 목소리에 변화는 없었지만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책을 미리 읽어 내용을 파악하고 수시로 목소리를 가다듬어야 하기 때문에 1시간 동안 녹음할 수 있는 소설의 분량은 많아야 15페이지 정도라고 한다.

김씨는 "시각장애인들은 청각이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발성에 신경을 많이 쓴다"며 "재미있는 책은 긴장감을 살리고 시나 수필은 감정을 넣어 읽어야 지루해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날 강서 점자도서관에는 김씨 외에도 송철오(27).윤민지(22.여).황주원(22.여)씨 등 세 명의 예비 아나운서가 녹음에 참여했다. 모두 아나운서 학원인 '봄온 아카데미'에서 수업을 들으며 '봄온 사랑 나눔회'에서 봉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 외에도 40여 명의 아나운서 지망생이 봄온 사랑 나눔회에서 활동하며 틈나는 대로 오디오북을 녹음하거나 시각장애인 자녀의 학습 도우미로 나서고 있다. 이들의 목소리가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책을 볼 수 있는 눈이 된 것이다.

사랑 나눔회가 만들어진 것은 지난달 초. 평소 녹음 봉사활동을 활발히 펼치던 강사와 수강생들이 모여 동아리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다른 수강생들을 끌어들였다. 다들 목소리에는 자신이 있는 터라 선뜻 받아들였다.

5년째 오디오북 녹음을 하고 있는 남주현(43.여.전 MBC 아나운서) 강사는 "직업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남을 도울 수 있는 오디오북 녹음은 즐거운 봉사"라며 "내 목소리를 듣고 감동과 희망을 얻는 시각장애인이 있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내가 힘을 얻게 된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들은 주로 다른 사람이 책을 읽어 목소리를 녹음해 놓은 오디오북을 통해 독서를 한다. 기호 등을 신경 써야 할 전문 서적은 점자도서를 이용하지만 소설이나 잡지.시.수필 등 대부분의 일반 서적은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오디오북을 선호한다. 그러나 오디오북을 녹음해 줄 자원봉사자가 적고, 재정난에 따른 녹음 시설 부족으로 점자도서관마다 오디오북이 크게 모자라는 상황이다. 강서 점자도서관은 지난해 9월 문을 열었다.

강서 점자도서관 송재욱 사무국장은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오디오북이 크게 부족했는데 예비 아나운서들이 자원봉사에 나서 큰 도움이 되고 있다"며 "이들이 녹음한 오디오북은 시각장애인들에게 특히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 점자=여섯 개의 점이 요철로 표시돼 한 개의 자음 또는 모음을 만든다. 육점 음소들의 조합으로 글자가 만들어진다.

손해용 기자<hysohn@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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