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너울 쓴 북의 위선극 남·북적 실무접촉 결렬이 남긴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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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7년만에 재개돼 국내외의 관심을 집중시켰던 남북적십자실무 접촉이 북한측의 정치선전효과를 노린 억지에 말려 무산되고 말았다.
당초 북한측의 저의를 헤아리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남·북 교류의 실마리를 잡자는 염원에서 어느 정도의 손해를 감수할 각오였던 우리측에 보여준 북한측의 기만적 선전 극은 환멸만을 더해주었다.
『속셈이 뻔한 놀음에 왜말러 드느냐』는 상당한 반론에도 불구하고 우리측이 북측제의를 받아들인 건 이를 계기로 남북대화의 발판을 만들 수만 있다면 뭔들 못하겠느냐는 충정에서였다.
사실 남북한관계에서 우리가 북한측의 물자제공제의를 받아들인 건 수락 그 자체가 획기적「사건」이었다.
우리의 경제력과 국내 체질에 대한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동족애와 인도주의를 내걸었던 이번 접촉에서 마저 북한은 고질적 병폐인 정치선전일변도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우리측이 북적의 물자 제공제의를 받아들인 만큼 이번에는 만남의 이름조차 물자 인수·인계를 위한「회담」이 아닌「실무접촉」이었다.
그저 물자의 수송·날짜·방법·장소·절차 등 실무적인 사항을 협의·처리하면 될 뿐이었다.
그렇지만 인도적 차원에서의 진지한 심사숙고 없이 버마 암살폭파사건 1주년을 앞두고 빗발칠 국제적 비난을 모면하고 김일성-김정일 부자세습 체제구축 등에서 비롯된 북한내의 불만을 남한은 더 살기 어렵다는 허의 선전으로 무마해 보자는 생각에서 시도된 선전 극이 성사 될리 만무 였다.
전처럼「제의」만으로 끝날 줄 알았던 북한은 우리의 수락으로 의표를 찔려 그들은 페이스를 잃고 말았다.
우리가 북적이. 요구한 물자수송 인원·배·자동차의 안전보장과 편의제공은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며 그들의 요구를 차례로 받아들이자 북쪽 실무대표들이 당황의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평소의 생떼놀음을 재연한 것은 그들의 생리상 어쩌면 당연한 일 일는지도 모른다.
실무접촉에도 우리측은 물자운반은 배로 하고 인도·인수장소는 인천항으로 하자는 등 물자의 신속·간편한 운반을 위한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북적의 요구에 따라 육노 수송도 좋다, 물자하역을 위해선 속초항 보다는 북평 항이 좋을 것이라며 선뜻 양보를 하자 북적 측은『우리는 비행기로도 할 수 있다』는 허세를 부렸지만 어차피 그런 허세가 오래갈 수 는 없었다.
우리가 육노 수송에 동의하면서 판문점까지 싣고 올 것을 제의하자 북측은 서울까지의 직송을 고집했다.
뿐만 아니라 북한측이 파견한 요원과 기자들이 참가하는 전달식을 갖고 이들이 수재지역을 찾아가 수재민들을 위문하겠다고 까지 나왔다.
「재해 국 적십자사에 보내는 물자는 직접 그 적십자사에 보낸다」(제1장 4절 27조),「발송할 모든 품목은 주어진 지시에 따라 정확하게 행선지로 보내야한다」(부록 8절A항3조)는 등의 국제적십자연맹 재해구호편람의 조항에 벗어나는 정치선전의 저의를 드러낸 것이다. 우리가 이날 접촉에서 직송까지를 포함한 다른 제안을 모두 받아들였다면 선전효과를 노려 또 다른 억지주장을 들고 나갔으리라는 것도 충분히 예상된다.
논리적으로 점점 궁지에 몰리자 북적 수석대표 한웅식은 1백여 내외신 기자들의 눈길을 감당할 수 없는 듯『상부의 지시를 다시 받으려면 평양을 다녀와야 하므로 3일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니 21일 다시 만나자』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한적의 이 수석대표는 물자제공제의를 이미 받아들인 이상 이번 접촉은 실무절차를 밟기 위한 것이므로 다시 상부의 결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서 21일 재 접촉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실제로 북한측이 서울직송 등 정치선전 적 주장을 고집한다면 재 접촉은 무의미하다.
아뭏든 남북교류와 대화의 전기가 마련되지 않을까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국민들의 실망은 적지 않다.
그렇지만 앞으로 북한에 재해가 발생할 경우 우리가 물자제공을 해주겠다고 했고 북한측도 접촉벽두에 같은 의사를 천명했으므로 이번의 제의 수락과 접촉이 전혀 무의미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만일 북한에 재난이 발생했을 경우 우리가 북한처럼 평양 직송 등 난제를 내세우지 않으면서 그들을 도우려할 때 북한측이 어떻게 나올까. 그런 제의도 쉽사리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겠지만 이번 일로 적어도 줄 마음도 없으면서 선전효과만을 노려 돕겠다는 허세는 상당히 숙어들것으로 전망된다. <김현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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