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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만2000가구 "전기 끊겼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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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다세대주택 반지하 월세방에서 남편과 둘이 사는 朴모(56)씨는 오늘도 버너로 밥을 지었다. 벌써 한달째다. 지난 2월부터 도시가스요금 15만원을 못내 가스 공급이 끊긴 것이다.

건설일용직인 남편(57)의 일거리가 지난해부터 점점 줄더니 연말께부터는 수입이 거의 없어졌기 때문이다.

"수도료도 30만원이 연체돼 단수경고장이 계속 날아와요. 이웃에 다니며 얻어마셔야 할 판이에요. IMF 때보다 더 어려운 것 같네요. 사는 게 너무 고달픕니다." 朴씨의 한숨이다.

#2. 목수인 金모(55)씨는 이달 초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포터트럭을 압류한다는 통보를 받았다.

보험료를 40개월이나 체납한 게 이유다. 개인회사를 다니다 지난해 가을 실직한 아들과 보증금 4백만원, 월세 32만원짜리 셋방살이를 하는 金씨는 울상이다.

부자(父子)는 며칠 전 "일거리가 끊겨 전기료.수도료도 못내는 판에 건강보험료는 어떻게 내느냐. 자동차마저 빼앗기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며 건보공단에 진정을 냈다.

장기 불황이 가져온 서민들의 어려움이 심각한 수준을 넘어섰다.

전기.수도.가스료나 건강보험료 등 기초생활비용을 못내 공급이 끊기고 재산을 압류당하는 일이 '외환위기 이후 최다(最多)'다.

지난달 서울에서 단전(斷電)조치를 당한 가구는 1만1천9백59곳(한전 집계, 자영업소.사업장 포함). 올 초만 해도 1만가구가 채 안됐다.

한국전력공사 영업운영팀 관계자는 "석달 이상 전기료가 밀리면 단전 대상으로 분류해 보름간 말미를 준 뒤 단전에 들어간다. 단전대상에 오르는 가구 숫자가 1년 전에 비해 40%쯤 늘었다"고 말했다. 수도료도 마찬가지다. 지난 1분기 서울시의 수도료 연체건수는 29만1백4건.

지난해 같은 기간(22만3천2백16건)보다 20% 가량 늘었다. 올 들어 넉달째 수도요금 25만7천원을 못내 단수위기에 놓인 남대문 의류상 李모(60)씨는 "매출이 지난해의 4분의 1도 안된다. 수도료.전기료.국민연금 다 못내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 요금1과 관계자는 "올 들어 제때 수도요금을 내지 못하는 자영업자들이 크게 늘고 있다"며 "곧 단수조치에 들어가는 가구가 많아질 것"이라고 전했다.

가스가 끊기는 가구도 지난해에 비해 15~20% 정도 늘었다는 게 가스공급업체들의 말이다. 노원.도봉.강북구 등 서울 동북지역에 가스를 공급하는 한진도시가스의 박종근 팀장은 "외환위기 이후 이렇게 연체건수가 늘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가스료를 못내는 영세민들은 전기료.수도료 등도 함께 연체하고 있는 '다중 연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전했다.

◆재산 압류도 급증=체납시 재산이 압류되는 건강보험의 경우 압류 사례가 껑충껑충 뛰고 있다. 특히 지역가입자의 경우 2001년 29만2천88건에서 지난해는 50만1천36건으로 거의 두배 가까이 늘었다. 올해는 이보다도 훨씬 더 많아질 것이라는 게 공단측의 예상이다.

공단측은 "건보재정 안정화를 위해 재산압류가 불가피하다"고 설명한다. 공단 홈페이지 등에는 "수입이 줄어 보험료를 못냈는데 재산까지 압류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민원인들의 항의도 쏟아지고 있다.

김정하.천인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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