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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행의 일치가 중요-하현강<연세대교수·한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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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84년 9월6일 밤9시 TV뉴스시간에 중계된 대한민국 대통령의 최초의 일본 공식방문을 환영하는 일황의 만찬사를 수많은 사람들이 주의깊게 들어보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마도 1945년8월15일 일황의 항복방송이래 가장 큰 민족적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리고 우리는 특히 그 만찬사에서 과연 일황이 과거 제국주의 일본이 우리민족에게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어느정도 사과하고 있느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민족이면 누구나 그 내용이 흡족하지 못하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느꼈을 것으로 생각한다. 과거 일제의 가혹한 식민지지배에 대해서 일황은 『금세기의 한 시기에 있어서 양국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로 표현하고있기 때문이다. 비록 일황은 현행 일본의 헌법구조와 관례상 잘못을 솔직이 시인하고 반성하는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감안한다 할지라도 과거 오랜기간에 걸쳐 크나큰 희생과 시련을 겪은 우리민족으로서는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다.
다만 일황의 신분으로서는 하지 못한 일본의 솔직한 과오시인과 사과와 반성은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서라도 발표되어야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일본의 그 누구가 우리 민족에 대해서 강도높은 사과의 말을 하느냐하는 그 말 자체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한다할지라도 실제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말 한마디에 천냥 빚도 갚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경우 그 말 한마디는 상대방에게 어떤 감동을 줄수 있는 신뢰감이 뒷받침되었을 때에 가능하다는 단서를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에 있어서도 언행이 일치하지 않은 사람은 믿을 수 없고 그 인격을 경멸하게된다. 나라와 나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일본은 우리 민족에게 말 다르고 행동 다른 일을 되풀이해 왔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일본을 불신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불행했던 한일관계의 역사적 소산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흔히 과거의 역사적 과오를 들추는 것은 그 비관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과오는 되풀이되어서는 안되겠다는 교훈을 얻게될 때에 비로소 오늘에 그 의미를 찾게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일본의 과오를 잠깐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침략과정에서 말 다르고 행동 다른 일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일제의 침략사는 바로 식언의 역사였다. 가령 일제침략의 발판이 된 1904년의 한일의정서에서 당시 「일본정부는 한국의 독립급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사」라고 굳게 약속했다. 곧 일본정부는 이를 식언했다. 1905년 일본은 한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을 보호하겠다고 했다. 1906년 초대 통감이 된 이등박문은 그 취임연설에서 「한국의 시정개선을 위하여 여는 만강의 열성으로 이에 부하겠다」고 하였다.
심지어 일제는 1910년 우리의 주권을 강탈하는 조약서문에서 양국의 상호 행복을 증진하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기 위하여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다고 강변하고 있을 정도다.
이제 일본이 우리와 가까운, 그리고 친밀한 이웃관계를 맺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일본에 대한 불신감을 불식할 수 있도록 힘써야할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일본의 어떠한 현란한 미사려구의 말보다는 참된 행동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의 대응자세가 아닌가 한다.
한 개인이 인간사회에서 고립해서 살수 없듯이 한 국가도 국제사회에서 고립해서 발전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은 근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값비싼 댓가를 치르면서 쇄국의 비극을 맛보았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우리들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한편 주체성과 자주적 역량 없이 개국한 결과가 어떠한 비극을 가져왔는가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멀지않은 과거에 바로 우리 조상들이 저지른 과오를 되풀이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큰 역사적 비극에서 교훈을 얻고 그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때 그 값비싼 대가는 비로소 큰 의미를 가지게될 것이다.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국제정세는 격변하고 있다. 우리는 이에 탄력성 있고 유연하게 대처해 나가야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의 자주성은 잃지 말아야할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노력하면 되지 않을 일도 아니다. 우리는 과거에 더 어려운 상황도 이를 극복하고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 발전시켜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일본의 선처를 바라고 기다릴 것이 아니다. 일본이 선처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의 역량을 기르는데 피땀을 흘려야할 때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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