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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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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조선과 일본의 근세교린(교린)을 설명하는 자료로 「조선통신사도」가 있다.
최근 일본의 오오사까에서는 한 재일동포가 소장한「조선통신사」의 그림이 공개되어 새삼 그 시절의 소묘를 볼 수 있다.
「형보사년 조선국서봉정행렬도」. 폭28cm, 길이 80m나 되는 두루마리 그림.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2천4백여명이나 되는 극채세화인데다 「향보사년」(1719년) 이라는 연대가 있어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 제9차 조선통신사의 행렬도임이 밝혀진 것이다.
대마도 번주 종씨가 안내역으로 선두에 서고 보병과 잡병의 호위를 받은 조선통신사 일행의 당당한 행렬이 그 시대 한일관계의 실상을 충분히 설명한다.
통신사 일행은 조선조 국왕의 상징인 용깃발을 든 말탄 관리가 앞서고 국서를 실은 가마, 한복으로 정장한 정사와 부사가 탄 가마가 차례로 따르고 나팔과 북을 든 악대, 화가등 예술인파 의사들이 행렬의 꼬리를 이었다.
그림에 표현된 인물상들은 인상적이다. 조선사절의 풍모가 의관이 정제하고 보무당당한데 비해 이를 맞는 일본무사들은 아랫도리를 걷어올린 채 칼을 차고 맨발이 보통이었다.
물론 「조선통신사」그림이 이게 처음은 아니다. 두루마리, 병풍, 민속화와 판화등 1백여점이 아직 남아 있다. 두루마리 가운데는 길이가 1백30m나 되고 등장인원이 4천6백명이나 되는 것도 있다. 육로행렬도 외에 대선단 그림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건 그것보다 조선통신사의 존재다. 일본의 「도꾸가와」정권은 외국사절의 내빙이 그들의 권위를 높여주는 절호의 수단이었다.
조선통신사를 접대하고 선물하는 경비는 막대했지만, 그건 일세일대의 대행사일 수 밖에 없었다.
17세기부터 19세기초까지 국제교류가 끊겨 있던 일본으로선 선진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통로도 됐다.
일본의 문화인들이 통신사가 묵는 곳마다 장사진을 이루어 묵필, 서화 혹은 전적을 얻고자 했던 것도 알려져 있다.
일행은 뱃길로 대마도를 거쳐 근기의 나니와(난파)나 사까이(계)에 상륙한뒤 동해도를 누비며 강호(동경)까지 가서 당시 지배자인 쇼오군(장군)과 만났다.
여우길을 정사로 한 1607년의 1차 조선통신사는 수교와 포로 쇄환등 외교적 목적을 이루었고, 그 다음에는 대개 세이이다이쇼오군 (정이대장군)을 「일본국왕」으로 인정하는 세습 축하 사절이었다.
전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공개된 2백여년전의 「조선통신사도」는 격세를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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