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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외로울땐 「고향생각」불렀지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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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비바람에 날리고 찢겼던 나의생에 새로운 환희를 안겨준 남편 「야로슬라브·베이체크」-. 사랑하는 그를 만날 수 있었던 북경중앙미술학원시절의 아름다운추억들은 뒤로 돌리고 싶다.
나는 57년7월말 북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프라하로 갔다. 다섯달 된 첫아들 「파엘」을 품에 안고였다.
「베이체크」는 북경에 남았다. 미술학원에 연구생으로 와있던 그의 연구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였다.
그의 일이 모두 끝나는 다음해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갈 생각도 없지않았다. 그러나 연구에 지장을 줄 것이 걱정돼 모자가 먼저 떠나기로 했다.
우리는 57년에 결혼식을 올렸지만 사실상 결혼은 56년에 했다. 결혼허가가 늦게 떨어져 식이 늦어졌을 뿐이다.
체코정부의 허가는 신청즉시 나왔다. 북한측의 허가가 늦어졌다. 체코정부에선 결혼허가를 빨리 내주라고 북한측에 재촉까지 했다.· 북한측 허가가 나오던 57년4월27일, 우리는 북경주재 체코대사관에서 결혼식을 가졌다. 가까운 친구들만이 참석한 조촐한 결혼식이었다. 나는 이날부터 체코국민이 됐다.
프라하에서 1백km쯤 떨어진 시골에서 살고있던 시부모님이 프라하공항까지 자동차를 갖고 우리모자를 마중나왔다. 두명의 시동생도 보였다.

<공모전서 1등 차지>
하루아침에 서양사람국적을 갖게된 나는 사진으로만 서로 낯을 익혔던 시댁식구들과 어색한 상봉을 했다. 말이 통하지않아 어색함이 더했다. 남편이라도 곁에 있었더라면 하는 생각도 났다.
시부모님댁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시댁식구들은 따듯했다. 시부모님은 말못하는 이방며느리의 어려움을 더할 수 없이 이해해 주었다. 정말 소박하고 좋은 분들이였다. 특히 탄광에서 일하는 시아버지의 사당은 극진했다. 며느리사랑은 시아버지란말, 동서양이 한가지인 것 같았다.
그날부터 나는 어린 「파엘」을 키우며 시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남편을 기다리며 가사에 전념했다. 말배우기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인사말부터 시작해 장보기에 필요한 말들로 넓혀 나갔다.
이듬해 남편이 돌아왔다. 우리는 부모님댁에서 몇년 더 살다가 프라하로 이사했다. 체코도 핵가족사회였다.
「파벨」에 이어 딸「렌카」를 낳았다. 「렌카」는 나를 많이 닮았다.
이후 10년,아이들이 크는 동안 나는 집안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틈나는 사간은 모두 미술수업에 바쳤다. 남편 「베이체크」 는 귀국과 함께 왕성한 창작활동에 들어갔으나 본격적인 나의 작품활동은 북체코미술가회원 작품공모전에서 1등상을 탔던 67년부터 시작됐다.
지난 10여년간 나는 체코에서 10차례의 개인전을 가질 수 있었고 국제전에도 30여회 출품했다. 국제전무대는 주로 런던이었다. 「베이체크」는 창작활동 이상으로 사회활동에도 열성적이였다. 그는 체코미술가협회회장·북체코미협이사장·체코건축미술합동심사위원장등 숱한 직책을 맡아 눈코뜰새가 없는 것 같았다.
신경쓸 일이 많고 회의가 잦아 작품할 시간이 나지않을 정도였다. 그는 73년 그가 갖고 있던 모든 직책을 내놓았다. 창작에만 전념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부부는 현재 체코미술가협회 정회원일뿐이다. 내회원증번호는 84번이다.
체코미술가협회의 회원은 약1만명이며 정회원과 후보회원으로 구분돼있다.
정회원은 후보회원보다 정부일을 맡는데 우선권이 있고 작품을 파는데도 유리하다. 후보회원으로 일정기간을 거쳐야 정회원이 될 수 있다. 회원이 아닌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팔수도 없고 전시회도 가질 수 없다.
화가등 미술가들의 수입은. 다른 직업에 비해 많은 편이다.

<시부모 극진한 사랑>
우리부부도 건축가들과 손잡고 여러가지 일을 맡아하고 있어 부자는 아니지만 생활이 여유로운편이다. 건물내외부의 모자이크·타피스리·세라믹·조각장식일이 많다. 수입규모를 밝히기는 쑥스러운 일이나 상급생활을 하고있다.
중견봉급생활자의 월급은 4천크룬정도다. 미화1달러가 15크룬이니까 3백달러가 채 안되지만 생필품이 비싸지 않아 생활에 곤란은 없다. 농업부문이 약해 식료품이 풍족한 형편은 아니지만 배급제도는 없다. 자녀를 키우는 가정에선 육아보조금을 정부로부터 받는다.
「파벨」과 「렌카」가 결혼해서 따로나가 우리부부는 단둘이 살고있다. 단둘이라곤 하지만 「베이체크」와 내가 한 집에서 함께 지내는 시간은 주말뿐이다. 제각기 바쁘기 때문이다.
1주일내내 「베이체크」는 프라하에서 90km 떨어진 북체코의 커다란 스튜디오에서 혼자 지낸다. 남편의 스튜디오는 조각·도자기·회화등 미술 각분야의 작업실·전시실과 침실을 갖추고 있다. 그동안 모았던 돈은 이 스튜디오를 짓는데 모두 들어갔다. 「베이체크」가 이곳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나대로 브루노에 있는 타피스리공장에서 작품을 만든다. 주말에 부부가 만나는 곳은 프라하의 우리 아파트다.
우리는 또 프라하의 구시가인 말라스트라나의 글라로프가에 있는 조그마한 단독주택을 얼마전 마련했다. 옛날집을 사서 수리했다. 이제 이곳에 화실도 꾸밀 예정이다. 이 지역은 아주 로맨틱한 장소여서 내마음에 꼭든다.
남편과 나는 독일제소형승용차와 소제지프 니바를 번갈아 탄다. 독일제소형차는 주로 나의 쇼핑용이다.
나의 프라하생활은 행복하다. 체코사람들은 대체로 인종자별을 않는다. 이들이 싫어하는 것은 오직 독일사람뿐이다.

<5개 외국어를 구사>
그러나 때때로 맛보는 외로움은 어쩔수가 없다. 이때는 「베이체크」도 속수무책이다.
하던 일이 잘 안되거나 기분이 언짢을 땐 금세 고향생각이 난다. 가장 참기 힘든 때가 설날이다. 너무 외로와 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 된다.
그리고는 꽃피는 봄. 개성고녀시절 용수산에 올라 친구들과 개나리·진달래·철쭉을 꺾던 장면들이 신기루처럼 피어올랐다가 사라질 땐 안타깝기 한이 없다. 또추석은 어떤가. 모두 어제같은데 내겐 먼 옛날일 뿐이다.
외로울때 나는 혼자 노래를 불렀다.
고향생각, 남쪽나라 십자성, 봉선화, 바우고개, 물레방아 도는 내력, 메기의 추억…. 생각나는 노래들을 닥치는 대로 부르다 보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곤 했다.
체코에는 한국사람이 몇 없다. 프라하의 북한대사관직원과 체코남자와 결혼한 평양·청진출신 여인 4명이 전부다. 이들과는 1년에 한번 만날 기회도 없다. 10년동안 만나보지 못한 사람도 있다.
체코를 찾는 소련관광단속에 혹시나 우리교포가 섞여있지 않나 눈여겨 본 일도 있였으나 아직 한사람도 찾지 못했다.
이처럼 한국말을 쓸 기회라곤 좀처럼 없는 이곳에서 30년 가까이 살면서도 우리말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것도 딴은 이들 노래덕분인지도 모른다.
틈틈히 한글말 책을 구해 읽으며 노력했던 것도 물론 사실이다.
프라하의 도서관에 한글책들이 더러 꽂혀 있다. 나는 김소월시집, 임꺽정부, 춘향전, 장화홍련전등을 구해 읽었다.
모두 옛날 책들이다. 런던에서3년째 연이어 전시회를 가진 최근엔 그곳에서 요즘 나온 한글책을 몇권 얻어볼 수 있었다.
우리말을 잊지않은 덕택에 나는 5개국어를 말할 수 있는 셈이다. 우리말외에 일어, 중국어, 체코어, 영어를 할 줄 안다. 「베이체크」는 6개국어를 말한다. 모국어인 체코말과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가 유창하다.

<북괴서 비자 안내줘>
외로움 말고 내가 겪는 어려움이 또하나 있다. 체코의 기후다. 일조량이 아주 적고 밤낮 기온차가 심하다. 나는 감기에 자주 걸린다.
프라하에는 북한의 영자신문이 들어오고 있다. 나는 내게 익숙한 중국신문을 많이 읽는다. 작년의 KAL기격추사건도 신문을 보고 알았다.
나는 중국을 나의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의 꿈이던 미술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내게 주었고 내가 결혼한곳도 바로 그곳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중국사람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다. 프라하주재 중공대사관의 각종 리셉션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있다. 중공대사관은 요즘 점점 규모가커지고 있다.
나는 중국교포와도 친한 사이다. 프라하에는 나처럼 체코남자와 결혼한 4명의 중국여인이 살고 있다.
프라하의 북한대사관과는 10년전쯤 부터 서로거래가 끊어졌다. 그전에는 부부미술가인 우리에게 그들은 대사관가구구입이나 기타문제에 관해 협조해달라고 전화를 걸어오곤 했었다.
나는 북한에 살고있는 오빠와 언니를 만나보기 위해 북한방문을 원했던 일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북한대사관측 얘기론 평양측에서 안된다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기다리라고만 했다. 통일이 될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한일도 있다. 체코정부에선 오랫동안 혈육과 떨어wu 살고있는 나의 딱한 사정을 동정해서 출국허가를 해주었고 중공쪽에서도 경유비자발급에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북한비자가 문제였다. 그들의 답변은 한결같았다. 80세가 넘은 노모를 만나러 가겠다고 하는 교민이 있었지만 그에게도 비자는 나오지 않았다.
대사관직원은 불친절하고 불손하기까지 했다. 내남편「베이체크」가 외교관이 이렇게 예의도 없느냐고 대놓고 욕을 한일도 있었다.
김일성 생일선물을 기부하라는 요청도 있었다. 체코사람인 나는 그들의 지시를 따라야할 아무런 까닭이 없다. 그들의 국경절리셉션이나 영화관람초청도 그때부터는 외면했다.
대학을 나와 직장에 다니는「파벨」부부, 영화감독한테 시집간「렌카」부부, 「베이체크」와 나, 이렇게 우리일가는 여름철 휴가때면 간혹 유고슬라비아의 야드란해안으로 피서를 간다. 경치가 빼어나고 물결이 잔잔해 수영하기도 좋다.
따스한 모래밭에 아이들 부부와 남편, 내게 있어서 더할 수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런 시간에도 어쩌자고 저 수평선은 내가슴을 시리게 하는가.
가고싶은 고향, 보고싶은 형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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