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실학 가문' 자긍심 79년째 신정 쇱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한양 조씨 집성촌인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실마을은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아 79년째 양력설을 쇠고 있다. 새해 첫날인 1일 주실마을에서 한양 조씨 문중이 모여 차례를 지내고 있다. 영양=조문규 기자

"계십니까. 저희들 왔습니다." 조휘영(75).목영(57)씨 형제가 조카 등 10여 명과 이웃에 사는 삼촌 조윤석(78)씨 집을 찾았다.

"세배받으십시오." 이들이 나란히 서자 윤석씨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세배를 마친 휘영씨가 집으로 돌아오자 아들과 딸.사위.손자 등 20여 명이 차례로 세배를 올렸다.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래. 너희도 복 많이 받고 건강하거라."

그는 허리춤에 찬 돈주머니를 열고 손자.손녀들에게 일일이 세뱃돈을 나눠 주었다.

고향 집을 찾은 이들은 모두 한복에 두루마기를 입었다. 차례를 준비하는 며느리.딸.손녀는 고운 한복에 앞치마를 두르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집집마다 굴뚝에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1일 오전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속칭 '주실마을'엔 명절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이 마을에선 79년째 양력설을 쇠고 있다. 아버지.어머니의 고향에서 오랜만에 4촌.6촌 형제자매를 만난 아이들은 마냥 신이 난 표정이었다. 한양(漢陽) 조(趙)씨의 집성촌인 이 마을은 태백산맥의 일월산(해발 1219m) 자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안동에서 동북쪽으로 2시간 가까이 달려야 만날 수 있는 오지다.

세배가 끝나고 휘영씨 집에 어른 10여 명이 모여 차례를 지냈다. 정성 들여 마련한 차례 상 앞에 엎드려 조상의 음덕을 기리는 모습은 여느 집의 설날과 다름없었다.

이들은 차례를 마친 뒤 마주 앉아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번에 못 온 사람도 있네." "일이 바빠서 그렇지요. 내일 출근하는 사람이 먼 길을 올 수 있겠습니까."

이들은 서둘러 일어나 옆집으로 가 같은 식으로 다시 차례를 지냈다. 오전 7시 세배로 시작한 설날 행사는 세 집에서 차례를 지내고 낮 12시에 끝났다.

주실마을의 조씨 가문이 양력설을 쇠기 시작한 것은 1928년. 이중과세 폐지론이 일고 음력설이 '민속의 날' 로 지정되는 등 설날이 도마에 오를 때도 이들은 신정을 고집했다.

이유가 무엇일까. "1900년대 초 실학사상으로 무장한 조상이 양력 1월 1일이 '진짜 새해'라고 생각했지요. 서양의 문물을 익힌 개화파 어르신들이 합리적인 결론을 내린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결정을 따르고 있는 겁니다." 동태(52.한국섬유개발연구원 섬유정보팀장)씨의 설명이다. 양력설을 쇠는 게 일제의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는 물음에는 "항일단체인 신간회에서 활동한 어른이 많았고, 주실마을 주민 모두가 창씨개명을 거부했는데 어떻게 일제의 정책에 동조했다는 것이냐"고 되물었다.

아이들도 양력설이 익숙한 듯 명절 기분을 만끽했다.

"우리는 일 년에 설이 두 번이에요. 1일엔 외할아버지댁에서 쇠고, 또 한 번은 친할아버지 집에서 해요." 대구에 사는 휘영씨의 외손녀 정재은(12.초등 5년)양은 "둘 다 설날"이라고 했다.

이날 서울.부산.대구 등 도시에서 설을 쇠러 온 사람은 50여 명이었다.

주민들은 "80년대만 하더라도 300여 명이 귀향해 마을이 시끌벅적했는데…"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윤석씨는 이런 현실이 못마땅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해맞이는 양력 1월 1일에 하면서 설은 뒤늦게 쇠는 게 말이 되나. 설 연휴는 3일로 늘리면서 신정은 하루만 쉬게 하니 문제 아닌가. 정부 정책이 이래서야 원…."

하지만 증조할아버지의 고민을 모르는 아이들은 골목길을 뛰어다니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영양=홍권삼.조문규 기자

◆ 주실마을= 조선시대인 1629년 호은공 조전(趙佺)이 세운 마을. 조광조가 개혁정치를 하다 축출(기묘사화.1519년)되면서 한양에 있던 일족이 화를 피하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진 뒤 그 후손이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이다. 여기서 조씨들은 구한말 의병을 일으키고, 일제 강점기에는 신간회.청년동맹 등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했다. 또 마을에 영진의숙.배영학당.동진학교 등을 세워 신학문을 가르치는 등 일찌감치 신문물을 받아들여 많은 개화파 인사를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60여 가구에 100여 명만 남아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본명 동탁)과 조동일(국문학) 전 서울대 교수, 진보적 역사학자인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 등 많은 문사(文士)를 배출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