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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점 의병|"남편따라 못 죽은게 부끄러워 숨어살았죠"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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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말 홍일점의 여성의병이 현대에 살아있다. 한말 의병 중 어쩌면 유일한 여성이자 마지막 생존자일 이 할머니는 18세 처녀때 만난 항일의병장에 반해 그의 아내가 되고 남편의 부대원으로 1년여 전남일대에서 유격전을 벌이다 남편과 함께 체포됐으나 나이어린 여자란 이유로 살아남았다. 일제에 사형을 받고 남편이 순국, 과부가 된 여의병은 나라와 정의에 모든것을 바친 남편과의 단 한해 짧고도 뜨거운 인연을 가슴에 새겨 평생을 수절해 살아왔다.
최근들어 「생존한 여성의병」으로 존재가·확인된 주인공은 올해 94세의 양방매할머니(전남 영암군 금정면 남송리).
고향의 의변사를 20여년째 연구하던 독지의 향토사가가 10여년의 추격끝에 할머니를 찾았을 때 이제는 망백의 노파가 된 여의병은 화들짝 놀라며 『남편을 따라 죽지못한 것이 부끄러워 평생을 숨어살았는데 어찌 알고 왔느냐』며 주르르 눈물을 쏟았다.

<10여년간 추적>
서른아홉번째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하오4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124호 의병장 강무경의 묘소 앞에서 허리가 굽어 몸을 제대로 가누기조차 어려운 양씨가 부축을 받아가며 두 손을 이마에 맞대고 네번의 큰절울 올렸다.
『아이고, 아이고…』
호곡은 긴사설로 이어졌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 듣기는 어려웠다.
「강무경, 의병장, 전북인. 심남일과 같이 의병항쟁을 일으켰으며 1908년 보성에서 일군대부대와 일대 격전끝에 대승리를 거두었다. 1909년부터 산병전을 전개하여 남평·영암·보성등지에서 일군을 습격하니 군세가 진동하였다. 1909년 피신하던 중 심남일과 같이 체포되어 총살, 순국하시다. 1962년3월1일 건국공로훈장 국민훈장 받음.」
묘비의 뒷면에 새겨진 강의병장의 행적.
죽기전에 『국립묘지에 모셔졌다는 남편의 묘소를 찾아보는 것이 소원』이라는 할머니의 원을 풀어드리기 위해 친정조카 양충실씨(45)와 양할머니를 찾아낸 향토사가 진희범씨(59·전남 영암군 덕진면 운암리)가 광복절전날에 모시고 상경, 참배를 드리게 된것이다.
양할머니가 강의병장을 만난 것은 대한제국이 일제에 막 삼켜지려던 1908년9월. 전북 무주출신의 강의병장은 그 전해에 전남 함평에서 심남일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일제군·경찰과 싸우다 이듬해 영암으로 이동했다.
유격전에 유리한 산간으로 본거지를 옮긴 것.
의병부대는 영암군 금정면에 주둔하며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여자라서 방면>
이때 금정면의 선비 양덕관의 집에 의병장 강무경이 유숙했고 양선비의 6남매 중 둘째딸 양방매는 18세 아름다운 처녀로 32세 미청년 호남아였던 강의병장과 사랑을 싹 틔웠던것. 방매처녀의 큰오빠 양성일도 그때 20세 청년으로 의병에 가담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양할머니의 부모에게 알려졌고 남녀가 유별하던 세상 양선비는 두 사람이 당장에 예식을 올리도록 했다.
『9월 스무이튿날(음력)』이라고 양할머니는 지금도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곧 강의병장은 영암을 떠나야 했다. 일군이 대병력을 풀어 토벌전을 전개한 것. 강무경은 여자가 따라 나설데가 아니라며 집에 남을 것을 권유했으나 신부는『언제 무슨일을 당할지 모르는 남편,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갈이 죽겠다』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의병이 되어 나섰다.
이듬해 1909년10월9일 전남 화순군 능주면 바탕재 바윗굴에서 남편과 함께 일경에 체포될때까지 1년동안 양할머니는 남편부대의 일원으로 장흥 보성 강진 해남 광양등지까지 전남동남부 일대의 산악지방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한국독립운동사는 당시 심남일 의병장이 5백∼7백명, 강무경의병장이 3백∼5백명의 병력을 거느렸던 것으로 밝힌다.
그러나 전남의병의 활약도 파국이 다가왔다. 1909년9월1일부터 또다시 일대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심남일과 강무경은 포위망을 탈출하려고 산을 타고 북행하다 화순에서 붙잡혔다.

<창씨개명 안해>
나이 어린 여자였기에 양할머니와 심장군의 부인등 두 사람은 방면됐으나 심남일 ·강무경 두 의병장은 광주를 거쳐 대구형무소에서 1910년9월1일(음력)처형됐다. 대한제국이 망한 뒤 한달 뒤였다.
스무살 과부가 된 양할머니는 친정에 돌아왔다. 소생도 없었지만 그는 의병장 강무경의 아내로 수절했다. 한때 주위에서 개가를 권하기도 했으나 그녀의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역시 의병으로 활약하다 병사한 큰오빠의 딸 등 친정조카들을 기르며 일제36년을 살았다. 일제 말 창씨개명도 하지 않았다.
해방 후 1962년 강무경의병장은 독립유공포상을 받았으나 호적에도 오르지 않은 아내 양할머니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현재 양할머니는 둘째오빠의 차남인 충실씨가 모시고있다. 논 서마지기 농사의 극빈 살림.
『살면 얼마를 살것소. 죽은 뒤 우리 서방님 곁에나 묻어주면 원이 없어…』양할머니의 마지막 남은 소망은 남편의 곁. <문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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